삶의 우연과 진실을 탐구하다: 줄리언 반스 신작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 신작 장편소설

두 차례 이혼을 겪으며 삶의 중차대한 위기를 맞은 닐은 어느 날 ‘문화와 문명’이라는 성인 대상 야간강좌에서 엘리자베스 핀치 교수를 만난다. 핀치는 “거위 배 속에 사료를 채우듯” 이런저런 지식을 주입하지 않고, 수강생들에게 스스로 사고하도록 유도하는 특별한 교수였다. 현명하면서도 방대한 지식과 신비로운 매력을 겸비한 핀치 교수에게 닐은 금방 매료되고, 이후 그를 흠모하며 20년에 걸쳐 인연을 이어 간다.

만날 때마다 둘은 75분이라는 시간을 정해놓고 함께 점심을 먹으며 철학과 역사, 윤리 등에 관한 심도 있는 지적 토론을 즐긴다. 그러던 어느 날 핀치 교수는 갑작스럽게 세상을 뜨고 만다. 평생을 써온 각종 노트와 서류를 닐에게 유품으로 남긴 채.

영국의 동시대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꼽히는 줄리언 반스의 신작 장편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는 결혼과 직업에서 실패를 맛보고 고비를 맞은 한 남자가 삶에 큰 영감을 주는 교수를 운명처럼 만나면서 시작한다.

닐과 핀치 교수는 역사의 승자들에 의해 ‘배교자’로 불리던 율리아누스를 함께 탐구한다. 4세기 로마 황제였던 율리아누스는 로마 제국의 그리스도교화를 거스르고 다신교인 로마 종교의 부활을 꿈꿨던 인물이다. 최후의 비(非) 기독교인 로마 황제였던 그는 쇠락하는 제국의 부흥을 위해 로마의 전통을 부활시켜 개혁하려고 했지만, 이 때문에 후세의 기독교도들로부터 ‘배교자 율리아누스’라는 멸칭을 얻었다.

닐은 핀치 교수가 자신에게 남긴 유품들을 살펴보며 모종의 신호가 있음을 감지하고, 전에 미완성 과제로 제출했던 율리아누스에 관한 에세이를 완성하기로 결심한다.

핀치 교수를 회고하면서 에세이를 써 나가면서 닐은 점점 예상하지 못했던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자신의 우상과도 같았던 핀치를 회상하며 그를 자신만의 일관된 서사로 이해하려 애쓰지만, 이는 핀치와 율리아누스 모두 일신론(一神論)을 경계하고 배격했다는 점에서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결국, 닐은 핀치를 기억하는 다른 학생의 목소리와 회고를 통해 결코 타인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혼란을 느낀다.

반스의 전작들처럼 인생의 우연과 필연, 반전과 아이러니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특히 작가는 누군가의 삶과 그의 다양한 면모들을 하나의 서사로 이해한다는 자체가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이라고 닐과 핀치라는 두 인물을 통해 섬세하게 보여준다.

반스는 인간의 삶과 사람들이 제각각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 얼마나 파편적이며 불확실한지를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를 넘나들며 솜씨 좋게 그려냈다. 아울러 작가의 철학과 역사에 대한 깊은 애정과 관심이 방대하게 녹아 있어 읽는 이들에게 지적인 즐거움도 안겨준다. 줄리언 반스만이 쓸 수 있는 이 개성 가득한 신작에 그의 오랜 팬들은 실망하지 않을 것 같다. 다산책방. 정영목 옮김. 3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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