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니가타현 “사도광산 가치 에도시대 한정”…재신청도 ‘꼼수’ 전략

세계유산등재추진실장 인터뷰…"20세기 시설, 추가 등재 계획 없어"

메이지시대 이후 건설된 사도광산 갱도.
‘사도광산’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는 일본 니가타현이 서류 미비로 인한 재신청 과정에서도 조선인이 강제로 동원된 20세기 유적을 제외하고 에도시대(1603∼1867) 유적만 가치가 있다는 ‘꼼수’ 전략을 고수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사와다 아쓰시 니가타현 세계유산등재추진실장은 9일 연합뉴스와 서면 인터뷰에서 “사도광산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OUV)는 16세기 후반부터 19세기 후반까지의 전통적 금 생산 기술과 체제에 있기 때문에 전시(태평양전쟁) 중의 역사는 사도광산의 세계유산 가치와 관계가 없다”고 주장했다.

니가타현과 일본 정부는 사도광산의 세계유산 명칭을 ‘사도섬의 금산(金山)’으로 정하고, 세계유산 필수 요건인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에도시대(1603∼1867)의 금 생산으로 한정했다.

이와 관련해 사와다 실장은 “당시에는 해외와 기술 교류가 제한돼 있었다”며 “사도광산에서는 독자적인 전통 수공업 방식으로 세계 최고 품질의 금을 최대 규모로 생산했다”고 강조했다.

그는 사도광산이 에도시대에 세계 최대의 금광이었다는 견해를 뒷받침하는 자료로 후모토 사부로가 1956년 펴낸 ‘사도 금은산(金銀山) 사화(史話)’를 제시했다. 니가타현 사도섬이 에도 막부(幕府)에 봉납한 세금을 분석한 이 자료를 보면 1620∼1640년 무렵 사도섬에서 연간 1∼2t(톤)의 금이 나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당시 유럽의 유명한 광산인 슬로바키아 ‘반스카 슈티아브니차’에서도 연간 금 생산량이 1t을 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사적 사도금산’ 홈페이지에는 사도광산의 역사가 1601년부터 1989년까지 400년 가까이 이어졌다는 글이 있지만, 니가타현과 일본 정부는 그중에서 16세기 후반 이후 약 300년간만 세계유산 가치가 있다는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다. 유산이 지닌 ‘전체 역사’를 외면하는 이러한 견해는 조선인 강제노동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기 위한 전략으로 분석된다.

이에 대해 사와다 실장은 “19세기 후반 이후에는 수공업 방식이 아니라 세계 각지의 광산과 유사한 기계화된 기술이 적용됐다”며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발견하기 어려워 세계유산 대상에서 제외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밝혔다. 이어 근현대 시설을 세계유산에 확장 등재할 계획이 있느냐는 질문에는 “그런 계획이 없다”고 답했다.

아이카와 광산은 근현대 경관이 많이 남아 있어 관람객이 에도시대와 근현대 이후 유산을 명확히 구분하기 어렵다는 지적에는 “가이드맵 같은 안내 표지 등으로 적절하게 세계유산 범위를 설명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일본이 사도광산을 세계유산으로 신청한 이후 한국 정부가 유감을 표명한 데 대해 “외교와 관련된 문제는 국가(중앙정부)가 적절히 대응할 것으로 생각한다”며 명확한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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