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랫동안 많은 책을 읽었지만 내 가슴 속에서 오랫동안 나를 괴롭히는 책 하나가 있다. 그 책은 러시아 지리학자 바츨라프 세로셰프스키가 1903년 조선을 방문하고 돌아가 쓴 ‘조선견문록’ 이다.
그 책 내용을 간단히 소개하면 이렇다. 조선은 울부짖는 바람의 나라, 해안 절벽에서 때리는 모진 바람소리처럼 울부짖는 백성, 산등성에서 휘몰아치는 삭풍을 안고 사는 백성, 그 위태로운 절벽과 깊은 계곡사이에 매달려 울부짖는 군상, 흐트러진 초가집에서 울부짖는 원망의 소리가 들리는 그것이 조선의 풍경이었다고 썼다. 나는 바츨라프가 왜 조선을 바람의 나라라고 썼으며 눈물의 나라라고 썼는지를 고민하고 생각해 보았다.
바츨라프가 조선을 방문할 당시는 고종이 1907 년 일본에 의하여 강제 퇴위되고 고종의 아들 순종이 조선왕조 제 27대 왕에 오르면서 1910년 조선의 주권이 한일합병조약(경술국치)으로 일본으로 넘어가는 시기였기 때문에 사회는 극도로 혼란에 빠져 있고, 백성들은 한일합병을 반대하는 항일투쟁을 곳곳에서 일으켰으며, 백성들은 먹을 것이 없어 산에서 초근목피로 겨우 연명했고, 일경들은 조선인들을 마구잡이로 구속시키고 폭행 했다. 백성들은 기약 없는 유량민으로 전략하는 시기였다. 이런 국내사정과 국외적으로는 친소정책으로 양분되는 시기였다. 그런 혼란한 사회속에서 살아가는 백성들의 고통을 위태로운 절벽에 매달려 울부짖는 백성으로 묘사했다면 독자들도 공감이 가지 않는가. 나는 그의 조선견문록을 읽으면서 내가 살아온 조국 대한민국의 현상이 늘 가슴속을 짓눌렀기 때문에 나를 괴로움과 고통속에서 신음했다.
그럼 우리의 역사를 나의 괴로움을 써보자. 우리민족 5천년의 역사속에는 700 번이 넘는 내우외환에 근래에는 세계 역사상 보기 드문 동족상잔의 비극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있다. 나는 그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주인공으로 살았기 때문에 누구보다 그의 견문록을 이해하고 공감하면서도 그 지긋지긋한 과거를 잊고 싶어했다. 그러나 한 번 머릿속에 박힌 글은 세월이 가고 환경이 바뀌어져도 잊혀지지 않는다.
나는 1950년 6.25 사변과 더불어 이북에서 남한으로 피난와 유량민으로 이곳저곳으로 떠돌며 살았다. 당시 나는 겨우 10살 밖에 안된 어린 나이에 세상물정도 몰랐고 전쟁이 왜 났는지도 모르고 살았다. 그러던 어느날 밤 아버지의 손에 끌려 함경도 북청 고향 에서 남한으로 피난을 왔고 가진 고생을 하면서 살았다. 그야말로 바츨라프가 견문록에 쓴 것처럼 산등선에서 휘몰아치는 삭풍을 맞으며 살았고 길거리에서 어머니를 찾아 헤매였고 동생의 이름을 부르면서 세상을 살았다. 정말로 산등성이에서 휘몰아치는 비바람을 맞으면서 살았다. 그런 고통이 세월이 흐르면 지워질 줄 알았는데 지금까지도 내 마음속에는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다.
이 울음소리는 나 뿐만 아니라 고향을 북에 두고 온 모든 실향민들의 눈물이다. 내가 피난 올 때 그 많은 피난민들은 지금 10 만명도 남지 않았다고 한다(6.25 당시 피난민 수는 700 만명에 달한다). 나는 정말 조국을 원망하고 내 아버지가 미울 때가 많았다. ‘왜 철없는 나를 데리고 피난을 왔는가’하는 불평을 수없이 하면서 살았다. 이제 나는 인생의 황혼길에 접어들었고 내 삶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지금 나에게 무엇이 남아있겠는가. 나는 늘 내가 태어난 조국이 다시는 6.25 같은 동족상잔이 없어야 하고 바츨라프가 말하는 민족의 불행이 없어지고 국민들이 편한 세상이 오기를 간절히 바란다.
사람들은 나를 정상인으로 보겠지만 알고 보면 정신적 기형인이다. 왜냐하면 바츨라프의 글 속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울어야 마음이 편해지는 비정상적 생각 때문이다. 그래서 더 추해지지 않으려고 애를 쓰지만 가슴속에 맺힌 한 때문에 죽을 때까지 가야 될 기형인 것 같다. 독자들은 나와 같은 기형인이 되지 마라. 한국은 지금은 웃음짓는 나라니까.
강현진 새크라멘토 한국학교 이사장
그 책 내용을 간단히 소개하면 이렇다. 조선은 울부짖는 바람의 나라, 해안 절벽에서 때리는 모진 바람소리처럼 울부짖는 백성, 산등성에서 휘몰아치는 삭풍을 안고 사는 백성, 그 위태로운 절벽과 깊은 계곡사이에 매달려 울부짖는 군상, 흐트러진 초가집에서 울부짖는 원망의 소리가 들리는 그것이 조선의 풍경이었다고 썼다. 나는 바츨라프가 왜 조선을 바람의 나라라고 썼으며 눈물의 나라라고 썼는지를 고민하고 생각해 보았다.
바츨라프가 조선을 방문할 당시는 고종이 1907 년 일본에 의하여 강제 퇴위되고 고종의 아들 순종이 조선왕조 제 27대 왕에 오르면서 1910년 조선의 주권이 한일합병조약(경술국치)으로 일본으로 넘어가는 시기였기 때문에 사회는 극도로 혼란에 빠져 있고, 백성들은 한일합병을 반대하는 항일투쟁을 곳곳에서 일으켰으며, 백성들은 먹을 것이 없어 산에서 초근목피로 겨우 연명했고, 일경들은 조선인들을 마구잡이로 구속시키고 폭행 했다. 백성들은 기약 없는 유량민으로 전략하는 시기였다. 이런 국내사정과 국외적으로는 친소정책으로 양분되는 시기였다. 그런 혼란한 사회속에서 살아가는 백성들의 고통을 위태로운 절벽에 매달려 울부짖는 백성으로 묘사했다면 독자들도 공감이 가지 않는가. 나는 그의 조선견문록을 읽으면서 내가 살아온 조국 대한민국의 현상이 늘 가슴속을 짓눌렀기 때문에 나를 괴로움과 고통속에서 신음했다.
그럼 우리의 역사를 나의 괴로움을 써보자. 우리민족 5천년의 역사속에는 700 번이 넘는 내우외환에 근래에는 세계 역사상 보기 드문 동족상잔의 비극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있다. 나는 그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주인공으로 살았기 때문에 누구보다 그의 견문록을 이해하고 공감하면서도 그 지긋지긋한 과거를 잊고 싶어했다. 그러나 한 번 머릿속에 박힌 글은 세월이 가고 환경이 바뀌어져도 잊혀지지 않는다.
나는 1950년 6.25 사변과 더불어 이북에서 남한으로 피난와 유량민으로 이곳저곳으로 떠돌며 살았다. 당시 나는 겨우 10살 밖에 안된 어린 나이에 세상물정도 몰랐고 전쟁이 왜 났는지도 모르고 살았다. 그러던 어느날 밤 아버지의 손에 끌려 함경도 북청 고향 에서 남한으로 피난을 왔고 가진 고생을 하면서 살았다. 그야말로 바츨라프가 견문록에 쓴 것처럼 산등선에서 휘몰아치는 삭풍을 맞으며 살았고 길거리에서 어머니를 찾아 헤매였고 동생의 이름을 부르면서 세상을 살았다. 정말로 산등성이에서 휘몰아치는 비바람을 맞으면서 살았다. 그런 고통이 세월이 흐르면 지워질 줄 알았는데 지금까지도 내 마음속에는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다.
이 울음소리는 나 뿐만 아니라 고향을 북에 두고 온 모든 실향민들의 눈물이다. 내가 피난 올 때 그 많은 피난민들은 지금 10 만명도 남지 않았다고 한다(6.25 당시 피난민 수는 700 만명에 달한다). 나는 정말 조국을 원망하고 내 아버지가 미울 때가 많았다. ‘왜 철없는 나를 데리고 피난을 왔는가’하는 불평을 수없이 하면서 살았다. 이제 나는 인생의 황혼길에 접어들었고 내 삶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지금 나에게 무엇이 남아있겠는가. 나는 늘 내가 태어난 조국이 다시는 6.25 같은 동족상잔이 없어야 하고 바츨라프가 말하는 민족의 불행이 없어지고 국민들이 편한 세상이 오기를 간절히 바란다.
사람들은 나를 정상인으로 보겠지만 알고 보면 정신적 기형인이다. 왜냐하면 바츨라프의 글 속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울어야 마음이 편해지는 비정상적 생각 때문이다. 그래서 더 추해지지 않으려고 애를 쓰지만 가슴속에 맺힌 한 때문에 죽을 때까지 가야 될 기형인 것 같다. 독자들은 나와 같은 기형인이 되지 마라. 한국은 지금은 웃음짓는 나라니까.
강현진 새크라멘토 한국학교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