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80년대 수많은 히트곡·공연마다 구름 관중
그래미 12회 수상 로큰롤 명예의전당 2회 헌액
가정폭력·이혼 아픔 딛고 40대에 재기 성공
‘로큰롤의 여왕’으로 불리며 1960∼80년대를 풍미한 팝 스타 티나 터너가 별세했다. 항년 83세.
로이터 통신과 뉴욕타임스(NYT) 등에 따르면 터너의 대리인은 그가 오랜 투병 끝에 스위스 취리히 근처 퀴스나흐트에 있는 자택에서 평화롭게 숨을 거뒀다고 24일 밝혔다. 터너는 로큰롤 시대의 초창기라 할 수 있는 1950년대에 데뷔해 30여년간 팝 무대를 호령하며 솔(soul), R&B, 록 등 여러 장르에 걸쳐 수많은 히트곡을 남겼다. 호소력 짙은 허스키한 목소리에 폭발적인 가창력, 거침없는 무대 공연으로 전 세계 음악 팬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1939년 테네시주 브라운스빌의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 그의 본명은 애나 메이 불럭이었다. 어릴 때부터 교회 성가대에서 활동하는 등 노래하기를 좋아했다. 그는 이혼한 모친을 따라 세인트루이스로 이주해 고등학교에 다녔는데, 이곳에서 싱어송라이터이자 기타리스트 아이크 터너의 밴드 공연을 보러 갔다가 쉬는 시간에 마이크를 잡고 노래하는 모습이 그의 눈에 띄어 객원 가수로 발탁된다.
아이크 터너는 만화 ‘정글의 여왕’ 주인공 이름 시나에서 영감을 받아 그에게 ‘티나’라는 이름을 붙여줬고, 1960년 밴드 이름을 ‘아이크 앤드 티나 터너’로 바꿔 듀오 활동을 시작했다. 1962년 두 사람은 결혼했고, 16년간 함께 활동하며 ‘어 풀 인 러브'(A Fool in Love) 등 여러 히트곡을 냈다.
하지만 그는 결혼 생활 중 남편에게서 끊임없는 폭력과 학대를 당했다고 이혼 후 고백했다. 그의 회고록에 따르면 1976년 폭력에 견디다 못해 남편이 잠든 사이 도망쳤는데, 당시 그의 주머니에는 36센트와 주유 카드가 전부였다.
나이도 이미 40대에 접어들어 솔로 가수로 활동하는 데 몇 년간 어려움을 겪었지만, 동료 가수들의 도움으로 여러 무대에 초청돼 공연하면서 입지를 다지다 1984년 발표한 앨범 ‘프라이빗 댄서'(Private Dancer)가 큰 히트를 하면서 재기에 완벽하게 성공한다. 이 앨범의 대표곡 ‘왓츠 러브 갓 투 두 위드 잇'(What’s Love Got to Do with It)으로 1985년 그래미 시상식에서 ‘올해의 레코드’ 등 3개 부문을, 또 다른 수록곡 ‘베터 비 굿 투 미(Better Be Good To Me)’로 최우수 여성 록 보컬 퍼포먼스상을 받는 등 그해 그래미를 휩쓸었다.
‘아이크 앤드 티나’ 시절 받은 것까지 더하면 그래미에서 통산 12회 수상했고, 음반 판매량은 전 세계적으로 1억5천만여 장에 달한다. 1988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펼친 공연은 18만명의 관객을 동원해 당시 솔로 가수가 동원한 최다 유료 관객 기록을 새로 썼다. 또 그가 1999년 60세에 ‘트웬티 포 세븐'(Twenty Four Seven) 앨범을 발표하고 이듬해 펼친 세계 투어 공연은 1억 달러(약 1천300억원)가 넘는 티켓 판매고를 올려 솔로 가수 역대 최고 수입으로 기네스에 기록됐다.
1991년 아이크 터너와 함께 로큰롤 명예의전당에 입성했으며, 2001년에는 솔로 가수로 다시 헌액됐다. 2005년에는 케네디 센터 공로상(Kennedy Center Honor)을, 2018년에는 그래미 평생 공로상을 받았다. 미국의 권위 있는 대중음악 매체 롤링스톤은 터너를 역대 최고 음악인 100명 리스트에서 63위로 꼽은 바 있다.
그의 인생은 1985년 독일 EMI레코드 임원이었던 에르빈 바흐를 만나 사랑에 빠지면서 다시 전환점을 맞는다. 1988년 영국 런던으로 이주한 뒤 주로 유럽에서 머물며 활동했고, 2013년 바흐와 결혼하면서 스위스로 국적을 바꿨다. 1995년 007 시리즈 영화 ‘골든 아이’의 주제곡을 녹음했고, 2008∼2009년 월드 투어 공연을 끝으로 가수 활동을 접었다.
하지만 이후 2018년 남편과 함께 자신의 인생 역정을 그린 공연 ‘티나 터너 뮤지컬’을 제작해 런던과 독일 함부르크, 뉴욕 브로드웨이 무대에 올렸고, 이 공연 역시 큰 인기를 끌었다. 코로나19 시기 잠시 중단됐다가 2021년 재개됐고, 미국 투어 공연이 예정돼 있다. 전성기에는 ‘매드 맥스 3′(1985) 등 할리우드 영화에도 여러 차례 출연하고 주제곡도 불렀다. 그는 2008년 데일리메일 인터뷰에서 “내 음악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처럼 들리지 않는다. 여전히 강하게 서 있다. 나처럼”이라고 말했다.
뉴욕타임스 음악평론가인 존 퍼렐스는 티나 터너의 히트곡 대부분은 다른 작곡가가 썼지만, 터너의 보컬로 생동감을 얻게 된다면서 그의 목소리를 “특별한 악기”로 표현했다. 또 터너는 “낮은 비음부터 놀라울 정도로 깨끗한 고음까지 3단 음역대”를 보여준다고 평했다.
카린 장-피에르 백악관 대변인은 이날 브리핑에서 터너의 부고에 대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슬픈 소식”이라며 “그를 사랑한 공동체와 음악산업에 막대한 손실”이라고 애도했다.
로이터 통신과 뉴욕타임스(NYT) 등에 따르면 터너의 대리인은 그가 오랜 투병 끝에 스위스 취리히 근처 퀴스나흐트에 있는 자택에서 평화롭게 숨을 거뒀다고 24일 밝혔다. 터너는 로큰롤 시대의 초창기라 할 수 있는 1950년대에 데뷔해 30여년간 팝 무대를 호령하며 솔(soul), R&B, 록 등 여러 장르에 걸쳐 수많은 히트곡을 남겼다. 호소력 짙은 허스키한 목소리에 폭발적인 가창력, 거침없는 무대 공연으로 전 세계 음악 팬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1939년 테네시주 브라운스빌의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 그의 본명은 애나 메이 불럭이었다. 어릴 때부터 교회 성가대에서 활동하는 등 노래하기를 좋아했다. 그는 이혼한 모친을 따라 세인트루이스로 이주해 고등학교에 다녔는데, 이곳에서 싱어송라이터이자 기타리스트 아이크 터너의 밴드 공연을 보러 갔다가 쉬는 시간에 마이크를 잡고 노래하는 모습이 그의 눈에 띄어 객원 가수로 발탁된다.
아이크 터너는 만화 ‘정글의 여왕’ 주인공 이름 시나에서 영감을 받아 그에게 ‘티나’라는 이름을 붙여줬고, 1960년 밴드 이름을 ‘아이크 앤드 티나 터너’로 바꿔 듀오 활동을 시작했다. 1962년 두 사람은 결혼했고, 16년간 함께 활동하며 ‘어 풀 인 러브'(A Fool in Love) 등 여러 히트곡을 냈다.
하지만 그는 결혼 생활 중 남편에게서 끊임없는 폭력과 학대를 당했다고 이혼 후 고백했다. 그의 회고록에 따르면 1976년 폭력에 견디다 못해 남편이 잠든 사이 도망쳤는데, 당시 그의 주머니에는 36센트와 주유 카드가 전부였다.
나이도 이미 40대에 접어들어 솔로 가수로 활동하는 데 몇 년간 어려움을 겪었지만, 동료 가수들의 도움으로 여러 무대에 초청돼 공연하면서 입지를 다지다 1984년 발표한 앨범 ‘프라이빗 댄서'(Private Dancer)가 큰 히트를 하면서 재기에 완벽하게 성공한다. 이 앨범의 대표곡 ‘왓츠 러브 갓 투 두 위드 잇'(What’s Love Got to Do with It)으로 1985년 그래미 시상식에서 ‘올해의 레코드’ 등 3개 부문을, 또 다른 수록곡 ‘베터 비 굿 투 미(Better Be Good To Me)’로 최우수 여성 록 보컬 퍼포먼스상을 받는 등 그해 그래미를 휩쓸었다.
‘아이크 앤드 티나’ 시절 받은 것까지 더하면 그래미에서 통산 12회 수상했고, 음반 판매량은 전 세계적으로 1억5천만여 장에 달한다. 1988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펼친 공연은 18만명의 관객을 동원해 당시 솔로 가수가 동원한 최다 유료 관객 기록을 새로 썼다. 또 그가 1999년 60세에 ‘트웬티 포 세븐'(Twenty Four Seven) 앨범을 발표하고 이듬해 펼친 세계 투어 공연은 1억 달러(약 1천300억원)가 넘는 티켓 판매고를 올려 솔로 가수 역대 최고 수입으로 기네스에 기록됐다.
1991년 아이크 터너와 함께 로큰롤 명예의전당에 입성했으며, 2001년에는 솔로 가수로 다시 헌액됐다. 2005년에는 케네디 센터 공로상(Kennedy Center Honor)을, 2018년에는 그래미 평생 공로상을 받았다. 미국의 권위 있는 대중음악 매체 롤링스톤은 터너를 역대 최고 음악인 100명 리스트에서 63위로 꼽은 바 있다.
그의 인생은 1985년 독일 EMI레코드 임원이었던 에르빈 바흐를 만나 사랑에 빠지면서 다시 전환점을 맞는다. 1988년 영국 런던으로 이주한 뒤 주로 유럽에서 머물며 활동했고, 2013년 바흐와 결혼하면서 스위스로 국적을 바꿨다. 1995년 007 시리즈 영화 ‘골든 아이’의 주제곡을 녹음했고, 2008∼2009년 월드 투어 공연을 끝으로 가수 활동을 접었다.
하지만 이후 2018년 남편과 함께 자신의 인생 역정을 그린 공연 ‘티나 터너 뮤지컬’을 제작해 런던과 독일 함부르크, 뉴욕 브로드웨이 무대에 올렸고, 이 공연 역시 큰 인기를 끌었다. 코로나19 시기 잠시 중단됐다가 2021년 재개됐고, 미국 투어 공연이 예정돼 있다. 전성기에는 ‘매드 맥스 3′(1985) 등 할리우드 영화에도 여러 차례 출연하고 주제곡도 불렀다. 그는 2008년 데일리메일 인터뷰에서 “내 음악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처럼 들리지 않는다. 여전히 강하게 서 있다. 나처럼”이라고 말했다.
뉴욕타임스 음악평론가인 존 퍼렐스는 티나 터너의 히트곡 대부분은 다른 작곡가가 썼지만, 터너의 보컬로 생동감을 얻게 된다면서 그의 목소리를 “특별한 악기”로 표현했다. 또 터너는 “낮은 비음부터 놀라울 정도로 깨끗한 고음까지 3단 음역대”를 보여준다고 평했다.
카린 장-피에르 백악관 대변인은 이날 브리핑에서 터너의 부고에 대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슬픈 소식”이라며 “그를 사랑한 공동체와 음악산업에 막대한 손실”이라고 애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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