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뉴스랩은 미국 대도시 가운데 최초로 건립된 샌프란시스코 위안부 기림비 건립 4주년을 맞아, 기림비 건립 계획부터 제막식이 열리기까지의 과정을 다시 한번 되짚어보는 특집을 마련했다. 위안부 기림비가 왜 세워지게 됐는지,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살펴보며 샌프란시스코 위안부 기림비가 갖는 의미를 조명해본다. <편집자주>
► 중국계 커뮤니티서 시작된 기림비 건립 움직임
샌프란시스코에 거주하는 중국계 커뮤니티에서 일본군 위안부 기림비를 세운다는 소문이 무성하던 가운데, 2014년 8월경 중국과 일본 언론에서 관련 보도가 나왔다. 기림비 건립이 점차 구체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베이징과 도쿄발 외신 보도를 인용해 한국에서도 샌프란시스코 위안부 기림비 건립 소식을 전하는 기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 중국계 커뮤니티가 샌프란시스코 다운타운 중심인 포츠머스 광장에 일본군 위안부 조각상을 설치할 계획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으며, 한국 커뮤니티와도 협력하겠다는 방침이 소개됐다.
보도가 나오기 한 달 전부터 북가주 한인 커뮤니티에서도 일본에서 연이어 터져 나오던 위안부 관련 망언과 고노 담화 수정 움직임 등으로 반일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었다. 여성 인권 향상 운동을 펼치던 세계한민족여성네트워크(KOWIN) SF지회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 정부의 사과를 촉구하는 서명운동을 전개했고, 이 서명문은 당시 이경이 KOWIN-SF 지회장과 회원들이 샌프란시스코 일본 총영사관을 직접 방문해 전달했다. 그러나 한인 커뮤니티는 여전히 중국계 커뮤니티가 주도한 ‘위안부 기림비’ 건립 움직임에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중국 커뮤니티는 한인들의 참여를 원했지만 별다른 반응이 없자 독자적으로 위안부 기림비 건립 운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 운동은 곧바로 현실적인 벽에 부딪혔다. 문화와 예술의 도시로 명성이 높은 샌프란시스코시는 그 명성만큼이나 까다롭고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만 기림비와 같은 공공 조형물 설치를 허가해줬기 때문이다. 민간 단체의 힘만으로는 결코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
기림비 조형물의 디자인 심사와 설치 장소 승인 등은 예술위원회와 공원관리국 등 여러 기관에서 각각 논의되고 승인돼야 했으며, 각 위원회가 개최하는 공청회도 거쳐야 했다. 이 모든 절차를 마친 뒤 시의회에 안건이 상정돼 통과될 경우, 시장의 최종 승인을 받아야 공공장소에 기림비를 설립할 수 있었다. 절차도 복잡했지만, 기림비 모형 제작비와 설치 이후 유지·보수 비용 확보 등 재정적인 문제도 뒷받침돼야 비로소 시의회 안건 상정이 가능했다. 설령 시의회를 통과하더라도 시장이 거부권을 행사할 경우 모든 과정이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었다.
► CWJC 결성과 샌프란시스코 시의회 결의안 통한 위안부 기림비 건립 추진
중국 커뮤니티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두 가지 방안을 채택하게 된다. 첫 번째는 위안부 기림비 건립을 위한 ‘위안부정의연대(CWJC)’를 조직하는 것이었다. 위안부정의연대에는 이미 중국 커뮤니티 내에서 활동하던 ‘난징대학살 배상촉구 연대’ 핵심 인물들이 그대로 참여했다. 이 시기에 CWJC에 합류한 대표적인 인물이 릴리안 싱과 쥴리 탱 판사다. 샌프란시스코 법조계에서 명망이 높았던 두 판사는 CWJC 참여를 위해 판사직을 내려놓고 위안부 기림비 건립 활동에 전념하게 된다.
쥴리 탱 CWJC 공동대표는 베이뉴스랩과의 인터뷰에서 CWJC 설립 과정에 대해 “1990년대 후반 조직된 ‘난징대학살 배상촉구 연대’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이 CWJC를 조직했으며, 정확한 결성 시기는 기억나지 않지만 2015년 상반기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주류 사회에서 활동하던 두 판사는 이후 위안부 기림비 건립 과정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각종 행정 문제를 해결하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두 번째 방안은 시의회 결의안을 통한 기림비 건립이었다. 민간 단체 주도로 추진할 경우 여러 난관이 따르지만, 시의회가 결의안을 통해 의결할 경우 시간 단축은 물론 비용도 크게 절감할 수 있었다. 실제로 샌프란시스코 시의회에서 통과된 위안부 결의안에는 시 행정부 내 에이전시들이 위안부정의연대 등 커뮤니티 단체를 도와 위안부 기림비를 설립하라고 명시돼 있다(아래 첨부된 결의안 원문 참조).
또한 위안부 기림비 결의안이 발의됐던 2015년 당시 샌프란시스코 시의회에는 중국계 3명, 한국계 1명 등 전체 11명의 시의원 가운데 아시아계 시의원이 4명이나 활동하고 있었다. 통과를 장담할 수는 없었지만 시도해볼 가치는 충분했다.
중국 커뮤니티는 위안부 기림비 결의안을 발의해 줄 시의원을 물색했고, 에릭 마 의원을 전면에 내세웠다. 법학을 전공한 에릭 마 의원은 화인진보회(Chinese Progressive Association) 이사로 활동하며 아태계 인권 향상을 위한 다인종 정의연구소를 설립했고, 캘리포니아 변호사협회 인권위원회와 전미아태계 변호사협회 민권위원회에서도 활동하는 등 인권 문제에 앞장서온 인물이었다. 위안부 기림비 결의안 발의에 가장 적합한 인물로 평가됐다.
에릭 마 의원이 발의한 결의안에는 11명의 시의원 가운데 8명이 동참했다. 에릭 마, 한국계인 제인 김, 쥴리 크리스텐센, 노먼 이, 마리아 코헨, 데이비드 캄포스, 마크 퍼렐, 존 아발로스 의원이 결의안에 서명했다.
스캇 위너, 케이티 탱, 런던 브리드 시의원은 참여하지 않았다. 아시아계로 참여가 확실해 보였던 케이티 탱 의원은 이유가 명확히 알려지지 않은 채 결의안에 동참하지 않았고, 당시 시의회 의장이었던 런던 브리드와 스캇 위너 역시 서명하지 않았다. 이들이 결의안에 참여하지 않은 배경에는 일본 측 로비가 있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특히 런던 브리드는 일본 커뮤니티 단체들이 자리 잡고 있던 저팬 센터가 포함된 5지구에서 선출된 시의원이었던 만큼 일본 측 입장을 적극 대변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케이티 탱과 스캇 위너 역시 일본 커뮤니티의 로비 등으로 결의안에 동참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 시의원들의 마음 움직인 이용수 할머니의 증언… 결의안 통과에 결정적 역할
결의안이 발의된 이후 일본 측 로비는 상당한 효과를 발휘했다. 샌프란시스코 시의회에서 대표적인 친일 인사로 분류되던 런던 브리드는 공개적으로 반대 의사를 표명했고, 케이티 탱과 스캇 위너도 적극적이지는 않지만 결의안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 결의안은 2015년 7월 21일 처음 시의회 본회의에 상정됐다. 결과는 재심의 결정이었다. 만장일치로 가결되지 않아 소위원회에서 재심의를 받아야 했다. 이에 따라 에릭 마 의원이 속한 공공안전 및 서비스위원회에서 이 사안을 다시 심사하게 됐다.
첫 시도에서 결의안이 통과되지 못하자 발의에 동참했던 시의원들 사이에서도 동요가 일었다. 한국계인 제인 김 의원마저 찬성하지 않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왔고, 당시 시의장이던 런던 브리드의 강경한 반대 역시 영향을 미쳤다. 런던 브리드는 샌프란시스코 흑인 커뮤니티 내에서 인권 운동을 주도해온 인물로 지역구를 넘어 시 전체에서 큰 지지를 받았고 정치적 영향력도 컸다. 이러한 상황에서 결의안이 다시 상정되더라도 통과되기 어렵다는 전망이 우세했다.
중국 커뮤니티는 다급해졌다. 결의안을 통과시키기 위해서는 시의원들의 마음을 돌릴 결정적 계기가 필요했다. 이때 제안된 방안이 공청회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직접 증언을 듣자는 것이었다. 즉시 한국으로 연락이 닿았고, 이용수 할머니가 샌프란시스코로 오게 됐다. 이 모든 과정은 일본 측 반대 로비를 피하기 위해 극비리에 진행됐다.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이용수 할머니는 시의회에서 두 차례 증언했다. 2015년 7월 15일 에릭 마 의원 요청으로 열린 시의회 본회의에서 한 번, 이틀 뒤인 7월 17일 열린 공청회에서 다시 한 번 증언했다. 15일 시의회 본회의에는 당시 샌프란시스코 시장이던 에드 리도 참석해 이용수 할머니의 증언을 들었다.
이용수 할머니는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 겪어야 했던 참혹한 경험을 생생하게 증언했다. 하루에 수십 명의 군인을 상대해야 했다는 대목에서는 시의원들 사이에서 탄식이 흘러나오기도 했다. 이용수 할머니는 떨리는 목소리로 “제 한을 풀어주세요. 아름다운 샌프란시스코에 위안부 기림비를 꼭 세울 수 있도록 해주세요”라며 간청했다.
이틀 뒤 열린 공청회에서 다시 단상에 선 이용수 할머니는 증언을 이어갔다. 이날 공청회에는 소식을 듣고 온 일본계 참석자들도 다수 자리했다. 이용수 할머니가 증언을 이어갈 때마다 “거짓말을 하고 있다”며 방해가 이어졌고, 이를 통역을 통해 전해 들은 이용수 할머니는 “내가 역사의 산증인이다. 네가 직접 봤느냐”고 호통쳤다. 이에 공청회에 참석한 주민들은 이용수 할머니에게 큰 박수를 보냈다.
이용수 할머니의 두 차례 증언은 시의원들의 마음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일본 커뮤니티와 각별한 관계였던 런던 브리드 시의장 역시 공청회를 계기로 입장을 바꿨다. 일본 측이 내세웠던 ‘기림비 건설로 커뮤니티가 분열된다’는 논리는 인권이라는 명제 앞에 힘없이 무너졌다. 이용수 할머니의 증언은 샌프란시스코 위안부 기림비 건립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결의안은 두 달 뒤인 2015년 9월 22일 시의회에 다시 상정됐고,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제인 김 시의원은 표결에 앞서 이용수 할머니에게 한국말로 “할머니, 우리에게 용기를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 캄포스 의원은 결의안 통과 뒤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시의원들은 방청석에 있던 이용수 할머니를 찾아가 포옹했고, 청중들도 큰 박수로 결의안 통과를 환영했다. 이용수 할머니 역시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이날 결의안 통과로 미국 대도시 가운데 최초로 위안부 기림비 건립이 공식화됐다. 세계 인권 향상을 위한 또 하나의 중요한 진전이었다.
한편, 이용수 할머니의 샌프란시스코 방문은 결의안 통과에 그치지 않았다. 북가주 한인 커뮤니티가 마련한 환영 행사에 참석한 이용수 할머니는 이 자리에서 김진덕·정경식 재단 김한일 대표와 김순란 이사장을 만났고, 이 만남은 김진덕·정경식 재단이 위안부 기림비 건립 사업에 참여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 이후 한인 커뮤니티는 김진덕·정경식 재단을 중심으로 중국 커뮤니티를 도와 기림비 건립 사업에 본격적으로 동참하게 된다.
아래 자료는 2015년 9월 22일 통과된 샌프란시스코 위안부 기림비 건립을 위한 시의회 결의안 전문이다.
► 중국계 커뮤니티서 시작된 기림비 건립 움직임
샌프란시스코에 거주하는 중국계 커뮤니티에서 일본군 위안부 기림비를 세운다는 소문이 무성하던 가운데, 2014년 8월경 중국과 일본 언론에서 관련 보도가 나왔다. 기림비 건립이 점차 구체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베이징과 도쿄발 외신 보도를 인용해 한국에서도 샌프란시스코 위안부 기림비 건립 소식을 전하는 기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 중국계 커뮤니티가 샌프란시스코 다운타운 중심인 포츠머스 광장에 일본군 위안부 조각상을 설치할 계획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으며, 한국 커뮤니티와도 협력하겠다는 방침이 소개됐다.
보도가 나오기 한 달 전부터 북가주 한인 커뮤니티에서도 일본에서 연이어 터져 나오던 위안부 관련 망언과 고노 담화 수정 움직임 등으로 반일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었다. 여성 인권 향상 운동을 펼치던 세계한민족여성네트워크(KOWIN) SF지회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 정부의 사과를 촉구하는 서명운동을 전개했고, 이 서명문은 당시 이경이 KOWIN-SF 지회장과 회원들이 샌프란시스코 일본 총영사관을 직접 방문해 전달했다. 그러나 한인 커뮤니티는 여전히 중국계 커뮤니티가 주도한 ‘위안부 기림비’ 건립 움직임에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중국 커뮤니티는 한인들의 참여를 원했지만 별다른 반응이 없자 독자적으로 위안부 기림비 건립 운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 운동은 곧바로 현실적인 벽에 부딪혔다. 문화와 예술의 도시로 명성이 높은 샌프란시스코시는 그 명성만큼이나 까다롭고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만 기림비와 같은 공공 조형물 설치를 허가해줬기 때문이다. 민간 단체의 힘만으로는 결코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
기림비 조형물의 디자인 심사와 설치 장소 승인 등은 예술위원회와 공원관리국 등 여러 기관에서 각각 논의되고 승인돼야 했으며, 각 위원회가 개최하는 공청회도 거쳐야 했다. 이 모든 절차를 마친 뒤 시의회에 안건이 상정돼 통과될 경우, 시장의 최종 승인을 받아야 공공장소에 기림비를 설립할 수 있었다. 절차도 복잡했지만, 기림비 모형 제작비와 설치 이후 유지·보수 비용 확보 등 재정적인 문제도 뒷받침돼야 비로소 시의회 안건 상정이 가능했다. 설령 시의회를 통과하더라도 시장이 거부권을 행사할 경우 모든 과정이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었다.
► CWJC 결성과 샌프란시스코 시의회 결의안 통한 위안부 기림비 건립 추진
중국 커뮤니티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두 가지 방안을 채택하게 된다. 첫 번째는 위안부 기림비 건립을 위한 ‘위안부정의연대(CWJC)’를 조직하는 것이었다. 위안부정의연대에는 이미 중국 커뮤니티 내에서 활동하던 ‘난징대학살 배상촉구 연대’ 핵심 인물들이 그대로 참여했다. 이 시기에 CWJC에 합류한 대표적인 인물이 릴리안 싱과 쥴리 탱 판사다. 샌프란시스코 법조계에서 명망이 높았던 두 판사는 CWJC 참여를 위해 판사직을 내려놓고 위안부 기림비 건립 활동에 전념하게 된다.
쥴리 탱 CWJC 공동대표는 베이뉴스랩과의 인터뷰에서 CWJC 설립 과정에 대해 “1990년대 후반 조직된 ‘난징대학살 배상촉구 연대’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이 CWJC를 조직했으며, 정확한 결성 시기는 기억나지 않지만 2015년 상반기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주류 사회에서 활동하던 두 판사는 이후 위안부 기림비 건립 과정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각종 행정 문제를 해결하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두 번째 방안은 시의회 결의안을 통한 기림비 건립이었다. 민간 단체 주도로 추진할 경우 여러 난관이 따르지만, 시의회가 결의안을 통해 의결할 경우 시간 단축은 물론 비용도 크게 절감할 수 있었다. 실제로 샌프란시스코 시의회에서 통과된 위안부 결의안에는 시 행정부 내 에이전시들이 위안부정의연대 등 커뮤니티 단체를 도와 위안부 기림비를 설립하라고 명시돼 있다(아래 첨부된 결의안 원문 참조).
또한 위안부 기림비 결의안이 발의됐던 2015년 당시 샌프란시스코 시의회에는 중국계 3명, 한국계 1명 등 전체 11명의 시의원 가운데 아시아계 시의원이 4명이나 활동하고 있었다. 통과를 장담할 수는 없었지만 시도해볼 가치는 충분했다.
중국 커뮤니티는 위안부 기림비 결의안을 발의해 줄 시의원을 물색했고, 에릭 마 의원을 전면에 내세웠다. 법학을 전공한 에릭 마 의원은 화인진보회(Chinese Progressive Association) 이사로 활동하며 아태계 인권 향상을 위한 다인종 정의연구소를 설립했고, 캘리포니아 변호사협회 인권위원회와 전미아태계 변호사협회 민권위원회에서도 활동하는 등 인권 문제에 앞장서온 인물이었다. 위안부 기림비 결의안 발의에 가장 적합한 인물로 평가됐다.
에릭 마 의원이 발의한 결의안에는 11명의 시의원 가운데 8명이 동참했다. 에릭 마, 한국계인 제인 김, 쥴리 크리스텐센, 노먼 이, 마리아 코헨, 데이비드 캄포스, 마크 퍼렐, 존 아발로스 의원이 결의안에 서명했다.
스캇 위너, 케이티 탱, 런던 브리드 시의원은 참여하지 않았다. 아시아계로 참여가 확실해 보였던 케이티 탱 의원은 이유가 명확히 알려지지 않은 채 결의안에 동참하지 않았고, 당시 시의회 의장이었던 런던 브리드와 스캇 위너 역시 서명하지 않았다. 이들이 결의안에 참여하지 않은 배경에는 일본 측 로비가 있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특히 런던 브리드는 일본 커뮤니티 단체들이 자리 잡고 있던 저팬 센터가 포함된 5지구에서 선출된 시의원이었던 만큼 일본 측 입장을 적극 대변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케이티 탱과 스캇 위너 역시 일본 커뮤니티의 로비 등으로 결의안에 동참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 시의원들의 마음 움직인 이용수 할머니의 증언… 결의안 통과에 결정적 역할
결의안이 발의된 이후 일본 측 로비는 상당한 효과를 발휘했다. 샌프란시스코 시의회에서 대표적인 친일 인사로 분류되던 런던 브리드는 공개적으로 반대 의사를 표명했고, 케이티 탱과 스캇 위너도 적극적이지는 않지만 결의안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 결의안은 2015년 7월 21일 처음 시의회 본회의에 상정됐다. 결과는 재심의 결정이었다. 만장일치로 가결되지 않아 소위원회에서 재심의를 받아야 했다. 이에 따라 에릭 마 의원이 속한 공공안전 및 서비스위원회에서 이 사안을 다시 심사하게 됐다.
첫 시도에서 결의안이 통과되지 못하자 발의에 동참했던 시의원들 사이에서도 동요가 일었다. 한국계인 제인 김 의원마저 찬성하지 않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왔고, 당시 시의장이던 런던 브리드의 강경한 반대 역시 영향을 미쳤다. 런던 브리드는 샌프란시스코 흑인 커뮤니티 내에서 인권 운동을 주도해온 인물로 지역구를 넘어 시 전체에서 큰 지지를 받았고 정치적 영향력도 컸다. 이러한 상황에서 결의안이 다시 상정되더라도 통과되기 어렵다는 전망이 우세했다.
중국 커뮤니티는 다급해졌다. 결의안을 통과시키기 위해서는 시의원들의 마음을 돌릴 결정적 계기가 필요했다. 이때 제안된 방안이 공청회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직접 증언을 듣자는 것이었다. 즉시 한국으로 연락이 닿았고, 이용수 할머니가 샌프란시스코로 오게 됐다. 이 모든 과정은 일본 측 반대 로비를 피하기 위해 극비리에 진행됐다.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이용수 할머니는 시의회에서 두 차례 증언했다. 2015년 7월 15일 에릭 마 의원 요청으로 열린 시의회 본회의에서 한 번, 이틀 뒤인 7월 17일 열린 공청회에서 다시 한 번 증언했다. 15일 시의회 본회의에는 당시 샌프란시스코 시장이던 에드 리도 참석해 이용수 할머니의 증언을 들었다.
이용수 할머니는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 겪어야 했던 참혹한 경험을 생생하게 증언했다. 하루에 수십 명의 군인을 상대해야 했다는 대목에서는 시의원들 사이에서 탄식이 흘러나오기도 했다. 이용수 할머니는 떨리는 목소리로 “제 한을 풀어주세요. 아름다운 샌프란시스코에 위안부 기림비를 꼭 세울 수 있도록 해주세요”라며 간청했다.
이틀 뒤 열린 공청회에서 다시 단상에 선 이용수 할머니는 증언을 이어갔다. 이날 공청회에는 소식을 듣고 온 일본계 참석자들도 다수 자리했다. 이용수 할머니가 증언을 이어갈 때마다 “거짓말을 하고 있다”며 방해가 이어졌고, 이를 통역을 통해 전해 들은 이용수 할머니는 “내가 역사의 산증인이다. 네가 직접 봤느냐”고 호통쳤다. 이에 공청회에 참석한 주민들은 이용수 할머니에게 큰 박수를 보냈다.
이용수 할머니의 두 차례 증언은 시의원들의 마음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일본 커뮤니티와 각별한 관계였던 런던 브리드 시의장 역시 공청회를 계기로 입장을 바꿨다. 일본 측이 내세웠던 ‘기림비 건설로 커뮤니티가 분열된다’는 논리는 인권이라는 명제 앞에 힘없이 무너졌다. 이용수 할머니의 증언은 샌프란시스코 위안부 기림비 건립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결의안은 두 달 뒤인 2015년 9월 22일 시의회에 다시 상정됐고,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제인 김 시의원은 표결에 앞서 이용수 할머니에게 한국말로 “할머니, 우리에게 용기를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 캄포스 의원은 결의안 통과 뒤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시의원들은 방청석에 있던 이용수 할머니를 찾아가 포옹했고, 청중들도 큰 박수로 결의안 통과를 환영했다. 이용수 할머니 역시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이날 결의안 통과로 미국 대도시 가운데 최초로 위안부 기림비 건립이 공식화됐다. 세계 인권 향상을 위한 또 하나의 중요한 진전이었다.
한편, 이용수 할머니의 샌프란시스코 방문은 결의안 통과에 그치지 않았다. 북가주 한인 커뮤니티가 마련한 환영 행사에 참석한 이용수 할머니는 이 자리에서 김진덕·정경식 재단 김한일 대표와 김순란 이사장을 만났고, 이 만남은 김진덕·정경식 재단이 위안부 기림비 건립 사업에 참여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 이후 한인 커뮤니티는 김진덕·정경식 재단을 중심으로 중국 커뮤니티를 도와 기림비 건립 사업에 본격적으로 동참하게 된다.
아래 자료는 2015년 9월 22일 통과된 샌프란시스코 위안부 기림비 건립을 위한 시의회 결의안 전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