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특집] SF 위안부 기림비 4주년② SF시의회에서 결의안이 통과되기까지

2015년 9월 22일 샌프란시스코 시의회에서 위안부 결의안이 통과된 뒤 이용수 할머니가 환하게 웃으며 기뻐하고 있다. [베이뉴스랩 포토뱅크]
베이뉴스랩은 미국 대도시 중에서는 최초로 건립된 샌프란시스코 위안부 기림비 건립 4주년을 맞아 기림비 건립 계획부터 제막식이 열리기까지 과정을 다시 한번 되짚어 보는 특집을 마련했다. 위안부 기림비가 왜 세워지게 됐는지,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살펴보며 샌프란시스크 위안부 기림비가 갖는 의미를 조명해 본다. <편집자주>

►중국계 커뮤니티서 시작된 기림비 건립 움직임

샌프란시스코에 거주하는 중국계 커뮤니티에서 일본군 위안부 기림비를 세운다는 소문이 무성하던 상황에서 2014년 8월경에 중국과 일본에서 언론보도가 나왔다. 기림비 건립이 점점 구체화 되기 시작한 것이다. 베이징과 도쿄발 외신들의 보도를 인용해 한국에서도 샌프란시스코 위안부 기림비 건립을 보도하는 기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당시 언론들의 보도를 보면 중국계 커뮤니티에서 샌프란시스코 다운타운 중심인 포츠머스 광장에 일본군 위안부 조각상을 설치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한국 커뮤니티와도 협력하겠다고 보도하고 있다.

보도가 나오기 한달 전 북가주 한인 커뮤니티에서도 일본에서 연이어 터지고 있던 위안부 망언과 고노 담화 수정 등으로 ‘반일’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었다. 여성 인권 향상 운동을 펼치고 있던 세계한민족여성네트워크(KOWIN) SF지회가 나서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 정부의 사과를 촉구하는 서명운동을 펼쳤고, 이 서명문은 당시 이경이 KOWIN-SF 지회장과 회원들이 샌프란시스코 일본 총영사관을 직접 방문해 전달하기도 했다. 하지만 한인 커뮤니티는 여전히 중국계 커뮤니티가 시작한 ‘위안부 기림비’ 건립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중국 커뮤니티에서는 한인들의 참여를 원했지만 반응이 없자 독자적으로 위안부 기림비 건립 운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 운동은 곧바로 벽에 부딪히고 만다. 문화와 예술의 도시로 명성이 높았던 샌프란시스코시는 명성만큼 까다롭고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만 기림비와 같은 조형물 설치를 허가해 줬다. 민간 단체의 힘만으로는 결코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

기림비 조형물의 디자인 심사와 건립 장소 허가 등은 예술위원회와 공원 관리국 등에서 따로 따로 논의가 되고 통과돼야 하며 각각의 위원회에서 개최하는 공청회도 거쳐야 한다. 이 과정을 모두 거친 뒤 시의회에 안건이 상정돼 통과될 경우 시장의 최종 승인을 받아야 공공장소에 기림비를 설립할 수 있게 된다. 과정도 복잡한데다 기림비 모형 제작 그리고 건립될 경우 유지보수 비용 지원 확보 등등 재정적인 문제도 뒷받침이 돼야 그나마 시의회에 안건으로 상정을 시킬 수 있다. 시의회에서 안건이 통과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고, 시의회를 통과한 안건에 대해 시장이 거부권을 행사할 경우 이 모든 과정이 헛수고로 돌아갈 수 도 있었다.

►CWJC 결성과 샌프란시스코 시의회 결의안 통한 위안부 기림비 건립 추진

중국 커뮤니티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두 가지 방법을 채택하게 된다.

첫 번째는 위안부 기림비 건립을 위한 ‘위안부정의연대(CWJC)’를 조직하는 것이다. 위안부정의연대에는 이미 중국 커뮤니티내에서 활동하고 있던 ‘난징대학살 배상촉구 연대’ 핵심 인물들이 그대로 참여하게 된다. 이 시기에 CWJC에 참여한 대표적인 인물이 릴리안 싱과 쥴리 탱 판사다. 샌프란시스코 법조계에서 명망이 높았던 두 판사는 CWJC 참여를 위해 판사직까지 내려놓으며 위안부 기림비 건립을 위한 활동에 전념하게 된다.

쥴리 탱 CWJC 공동대표는 베이뉴스랩과의 인터뷰에서 CWCJ 설립과정에 대해 “1990년대 후반 조직된 ‘난징대학살 배상촉구 연대’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이 CWJC를 조직했고 결성 시기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2015년 상반기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주류 사회에서 활동하던 두 판사들은 이후 위안부 기림비 건립에 큰 영향을 미쳤고, 여러 행정문제들을 해결하는 데에도 많은 도움이 됐다.

두 번째는 시의회 결의안을 통한 기림비 건립이다. 민간 단체가 주도해 진행할 경우 여러 어려움을 겪을 수 있지만 시의회에서 결의안을 통해 의결을 할 경우 시간 단축은 물론 비용도 크게 절약할 수 있었다(실제 SF시의회에서 통과된 위안부 결의안에는 시 행정부 내 에이전시들이 위안부정의연대 등 커뮤니티 단체들을 도와 위안부 기림비를 설립하라고 명시돼 있다. 아래 첨부된 위안부 결의안 원문 참조).

또한 위안부 기림비 결의안의 발의됐던 2015년 샌프란시스코 시의회에는 중국계 3명, 한국계 1명 등 11명의 시의원 중 아시아게 시의원이 4명이다 활동하고 있었다. 통과를 장담할 수는 없었지만 시도해볼 가치는 충분히 있었다.

중국 커뮤니티에서는 위안부 기림비 결의안 발의를 해 줄 시의원을 물색했고, 에릭 마 의원을 내세워 결의안을 발의했다. 법학을 전공한 에릭 마 의원은 화인진보회(Chinese Progressive Association)의 이사로 활동하며 아태계 인권 향상을 위한 다인종 정의연구소를 설립했으며, 캘리포니아 변호사협회 인권위원회와 전미아태계 변호사협회 민권위원회에서 활동했을 만큼 인권 문제에 앞장섰던 인물이다. 위안부 기림비 결의안 발의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다.

에릭 마 의원이 발의한 결의안에는 11명의 시의원 중 8명이 동참했다. 에릭 마, 한국계인 제인 김, 쥴리 크리스텐센, 노먼 이, 마리아 코헨, 데이비드 캄포스, 마크 퍼렐, 존 아발로스가 결의안에 서명한 의원이다.

스캇 위너, 케이티 탱, 런던 브리드 시의원은 참여하지 않았다. 아시아계로 참여가 확실해 보였던 케이티 탱은 무슨 이유인지 결의안에 동참하지 않았으며, 당시 시의회 의장이었던 런던 브리드와 스캇 위너도 결의안에 서명하지 않았다. 이들이 결의안에 서명하지 않았던 이유는 일본의 로비 때문이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특히 당시 시의회 의장이었던 런던 브리드는 일본 커뮤니티 단체들이 자리잡고 있던 저팬 센터가 포함된 5지구에서 선출된 시의원이었던 터라 일본의 입장을 적극 대변하고 있었다. 케이티 탱과 스캇 위너 시의원도 일본 커뮤니티의 로비 등으로 결의안에 동참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시의원들의 마음 움직인 이용수 할머니의 증언…결의안 통과에 결정적 역할

결의안이 발의된 이후 일본의 로비는 큰 효과를 거뒀다. 샌프란시스코 시의회에서 대표적인 친일 인사로 분류되던 런던 브리드는 공개적으로 반대 의사를 표명하기까지 했으며, 케이티 탱과 스캇 위너도 적극적이진 않지만 결의안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 결의안이 첫 번째로 시의회에 상정됐다. 표결일은 2015년 7월 21일 이었다. 결과는 재심의 결정이었다. 만장일치로 가결되지 않아 소위원회에서 재심의를 받아야 했다. 재심의가 결정됐고 에릭마 의원이 속한 공공안전 및 서비스위원회에서 이 문제를 다시 심사했다.

첫 번째 시도에서 결의안이 통과되지 못하자 결의안 발의에 동참했던 시의원들도 흔들렸다. 한국계인 제인 김 의원도 찬성하지 않을 거라는 얘기까지 흘러 나왔다. 당시 시의장이던 런던 브리드가 강한 반대를 표명한 것도 영향을 줬다. 런던 브리드는 샌프란시스코 흑인 커뮤니티내에서 인권 운동을 주도한 인물로 지역구를 떠나 시 전체에서 큰 지지를 받았고 영향력도 컸다. 시의원 선거에도 영향을 줄 수 있기에 결의안 발의에 찬성했던 시의원들도 소극적으로 태도가 바뀌었고, 위안부 기림비 결의안이 다시 상정되더라도 통과되지 못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중국 커뮤니티에는 다급해졌다. 결의안을 통과시키기 위해서는 시의원들의 마음을 돌릴 수 있는 묘책이 필요했다. 이 때 방법으로 제안된 것이 공청회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증언을 들어보자는 것이었다. 즉각 한국으로 연락이 취해졌고, 이용수 할머니가 샌프란시스코로 날아왔다. 이 모든 과정은 일본의 반대 로비를 피하기 위해 극비리에 진행이 됐다.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이용수 할머니는 시의회에서 두 번 증언을 했다. 2015년 7월 15일 에릭 마 의원의 요청으로 열린 시의회 전체회의에서 한 번, 이틀 뒤인 7울 17일 열린 공청회에서 또 한 번 증언했다. 15일 시의회 전체회의에는 당시 샌프란시스코 시장이던 에드 리도 참석해 이용수 할머니의 증언을 들었다.

처음 열린 시의회 전체회의에서 이용수 할머니는 자신이 어린 시절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 겪어야 했던 참혹한 경험을 생생하게 증언했다. 하루에 수십 명의 군인을 상대해야 했다는 증언을 할 때에는 시의원들 사이에서 탄식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이용수 할머니는 떨리는 목소리로 “제 한을 풀어주세요. 아름다운 샌프란시스코에 위안부 기림비를 꼭 세울 수 있도록 해주세요”라며 간청했다.

이틀 뒤에 열린 공청회에서 단상에 다시 선 이용수 할머니는 증언을 이어갔다. 이날 공청회에는 소식을 듣고 온 일본계 참석자들도 다수 참석했다. 이용수 할머니가 증언을 이어갈때 마다 “거짓말을 하고 있다”며 증언을 방해했다. 통역을 통해 이 이야기를 들은 이용수 할머니는 “내가 역사의 산증인이다. 네가 직접 봤느냐”며 호통을 쳤고 공청회장에 모인 주민들은 이용수 할머니에게 박수를 보냈다.

이용수 할머니의 두 번에 걸친 증언은 시의원들의 마음을 완전히 돌려놨다. 일본 커뮤니티와 각별한 사이였던 런던 브리드 시의장도 공청회를 계기로 마음을 바꿨다. 일본이 내세웠던 위안부 기림비 건설로 커뮤니티가 분열된다는 논리가 인권이라는 명제 앞에 힘없이 부서진 것이다. 이용수 할머니의 증언이 샌프란시스코 위안부 기림비 건립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다.

결의안은 5일 뒤인 9월 22일 시의회에 다시 상정됐고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제인 김 시의원은 결의안 표결에 앞서 이용수 할머니에게 한국말로 “할머니 우리에게 용기를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 캄포스 의원은 결의안이 통과된 뒤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위안부 기림비 결의안이 통과된 뒤 시의원들은 방청석에 있던 이용수 할머니를 찾아 포옹했다. 청중들도 큰 박수로 결의안 통과를 환영했으며, 이용수 할머니도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이날 결의안 통과로 미국내 대도시에서는 최초로 위안부 기림비가 건립이 공식화 됐다. 세계 인권 향상을 위한 또 다른 큰 진전을 이뤄낸 것이다.

한편, 이용수 할머니의 샌프란시스코 방문은 위안부 결의안 통과만 이뤄낸 것이 아니었다. 북가주 한인 커뮤니티가 마련한 환영 행사에 참석한 이용수 할머니는 이 자리에서 김진덕・정경식 재단 김한일 대표와 김순란 이사장을 만나게 됐고, 이 만남은 김진덕・정경식 재단이 위안부 기림비 건립 사업에 참여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 이후 한인 커뮤니티는 김진덕・정경식 재단을 중심으로 중국 커뮤니티를 도와 기림비 건립 사업에 본격적으로 동참하게 된다.

아래 자료는 2015년 9월 22일 통과된 샌프란시스코 위안부 기림비 건립을 위한 시의회 결의안 내용.


최정현 기자 / choi@baynewsla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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