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상은 200여 점, 약 70점 확인"…청와대 보물은 행방불명
3월 26일은 안중근(1879〜1910)이 1910년 중국 뤼순 감옥에서 순국한 날이다. 그의 유해는 여전히 확인되지 않고 있다. 안중근은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한반도 식민지화를 주도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고, 이듬해 2월 14일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형이 집행되기까지 약 40일 동안 그는 옥중에서 많은 글씨를 남겼다.
26일(한국시간) 문화재청에 따르면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된 ‘안중근 의사 유묵’은 26점이다. 유묵은 생전에 남긴 글씨나 그림을 뜻한다. 안중근 유묵에는 경술년 2월 혹은 3월에 대한국인 안중근이 썼다는 글귀와 손바닥 도장이 남아 있다. ‘논어’나 ‘사기’ 같은 동양 고전 구절을 적은 작품이 있고, 마음을 나타내거나 세상 변화를 지적한 글씨도 있다.
예컨대 동국대 소장품인 ‘일일부독서구중생형극'(一日不讀書口中生荊棘)은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 안에 가시가 돋는다’를 의미하고, 또 다른 유묵인 ‘위국헌신군인본분'(爲國獻身軍人本分)은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것이 군인의 본분’을 뜻한다. 드물게 ‘인내'(忍耐), ‘극락'(極樂) 같은 단어만 적은 유묵도 있다.
안중근은 뤼순 감옥에서 글씨 200여 점을 썼다고 알려졌다. 보물로 지정된 유물보다 훨씬 많은 수치다. 안중근의사기념관 관계자는 “박은식 선생이 집필한 안중근 평전에 유묵 수에 관한 기록이 있다”며 “현재까지 확인된 글씨는 70점 정도 된다”고 말했다. 이어 “국내에 있는 유묵은 37〜38점이고, 보물로 지정되지 않은 개인 소장품도 있다”며 “외국에도 수십 점이 전하는데, 대부분은 일본에 있다”고 덧붙였다.
이 관계자는 “안중근 의사가 투옥 전에 쓴 서예 작품은 거의 없고, 안 의사의 죽음이 확정된 뒤 일본인 관리와 간수들이 앞다퉈 큰 글씨를 요청했다는 기록이 있다”며 “유묵 대부분은 일본으로 건너갔고, 일부가 후대에 한국에 기증됐다”고 설명했다.
안중근 유묵은 해방 70주년인 2015년 이후에도 꾸준히 한국으로 돌아왔다. 삼성문화재단은 지난 22일 안중근 유묵 2점의 보존처리를 한다고 밝혔다. 두 유묵은 각각 2016년과 2020년 일본인 소장가가 기증해 한국으로 귀환했다.
2016년에는 미술품 경매에 ‘황금백만량불여일교자'(黃金百萬兩不如一敎子) 유묵이 등장해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7억3천만 원에 구매했다. 이어 2017년에는 ‘세심대'(洗心臺) 글씨가 경합 끝에 4억 원에 팔렸고, 2018년에도 ‘승피백운지우제향의'(乘彼白雲至于帝鄕矣) 유묵이 7억5천만 원에 거래됐다.
이처럼 새로운 안중근 유묵이 속속 공개되고 있지만, 행방을 알 수 없어 도난 문화재로 등록된 글씨도 있다. 청와대에 있던 보물 ‘치악의악식자부족여의'(恥惡衣惡食者不足與議)다. 이 유묵은 1972년 8월 16일 보물로 지정됐고, 1976년 3월 홍익대를 설립한 이도영이 청와대에 기증했다. 1980년 전후에 사라진 것으로 추정되지만, 어떤 경위로 실종됐는지는 파악되지 않았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집무실을 이전하면 유묵 소재를 확인하기 위한 조사가 진행될 수 있지만, 발견 가능성은 크지 않은 것으로 분석된다.
26일(한국시간) 문화재청에 따르면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된 ‘안중근 의사 유묵’은 26점이다. 유묵은 생전에 남긴 글씨나 그림을 뜻한다. 안중근 유묵에는 경술년 2월 혹은 3월에 대한국인 안중근이 썼다는 글귀와 손바닥 도장이 남아 있다. ‘논어’나 ‘사기’ 같은 동양 고전 구절을 적은 작품이 있고, 마음을 나타내거나 세상 변화를 지적한 글씨도 있다.
예컨대 동국대 소장품인 ‘일일부독서구중생형극'(一日不讀書口中生荊棘)은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 안에 가시가 돋는다’를 의미하고, 또 다른 유묵인 ‘위국헌신군인본분'(爲國獻身軍人本分)은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것이 군인의 본분’을 뜻한다. 드물게 ‘인내'(忍耐), ‘극락'(極樂) 같은 단어만 적은 유묵도 있다.
안중근은 뤼순 감옥에서 글씨 200여 점을 썼다고 알려졌다. 보물로 지정된 유물보다 훨씬 많은 수치다. 안중근의사기념관 관계자는 “박은식 선생이 집필한 안중근 평전에 유묵 수에 관한 기록이 있다”며 “현재까지 확인된 글씨는 70점 정도 된다”고 말했다. 이어 “국내에 있는 유묵은 37〜38점이고, 보물로 지정되지 않은 개인 소장품도 있다”며 “외국에도 수십 점이 전하는데, 대부분은 일본에 있다”고 덧붙였다.
이 관계자는 “안중근 의사가 투옥 전에 쓴 서예 작품은 거의 없고, 안 의사의 죽음이 확정된 뒤 일본인 관리와 간수들이 앞다퉈 큰 글씨를 요청했다는 기록이 있다”며 “유묵 대부분은 일본으로 건너갔고, 일부가 후대에 한국에 기증됐다”고 설명했다.
안중근 유묵은 해방 70주년인 2015년 이후에도 꾸준히 한국으로 돌아왔다. 삼성문화재단은 지난 22일 안중근 유묵 2점의 보존처리를 한다고 밝혔다. 두 유묵은 각각 2016년과 2020년 일본인 소장가가 기증해 한국으로 귀환했다.
2016년에는 미술품 경매에 ‘황금백만량불여일교자'(黃金百萬兩不如一敎子) 유묵이 등장해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7억3천만 원에 구매했다. 이어 2017년에는 ‘세심대'(洗心臺) 글씨가 경합 끝에 4억 원에 팔렸고, 2018년에도 ‘승피백운지우제향의'(乘彼白雲至于帝鄕矣) 유묵이 7억5천만 원에 거래됐다.
이처럼 새로운 안중근 유묵이 속속 공개되고 있지만, 행방을 알 수 없어 도난 문화재로 등록된 글씨도 있다. 청와대에 있던 보물 ‘치악의악식자부족여의'(恥惡衣惡食者不足與議)다. 이 유묵은 1972년 8월 16일 보물로 지정됐고, 1976년 3월 홍익대를 설립한 이도영이 청와대에 기증했다. 1980년 전후에 사라진 것으로 추정되지만, 어떤 경위로 실종됐는지는 파악되지 않았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집무실을 이전하면 유묵 소재를 확인하기 위한 조사가 진행될 수 있지만, 발견 가능성은 크지 않은 것으로 분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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