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당하게 살라는 할아버지 신념 평생 가슴에 새기며 살아와
“독립유공자 보상금을 못 받았다고 서운하지 않다. 우리 할아버지가 그거 받으라고 독립운동하신 게 아니다.”
대구시 북구에 위치한 광복회 북구지회 건물. 이곳에서 만난 독립유공자 유족 이호(80)씨는 할아버지 사진을 들어 보이며 자랑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이 씨의 할아버지는 의열단 초창기 멤버로 만주와 국내에서 활약한 이수택 선생이다.
선생은 1910년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는 비극을 겪으며 19세의 나이에 독립운동가의 길을 걷게 된다. 3년여간 일합사 등 여러 독립운동 단체를 만들어 활동하다가 한계를 느낀 선생은 무력투쟁을 위해 만주로 올라갔다. 이때 그는 김원봉 등과 함께 항일비밀결사단체인 의열단 초창기 단원으로 활약해 만주에서 1년간 무기나 폭탄을 운반하고 주요 시설 폭파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의열단을 결성한 다음 해인 1920년에는 국내로 들어와 서울, 경성, 진주 등 각지를 돌아다니며 자금·무기 유통 등을 담당했다.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활발한 독립운동을 펼치던 이수택 선생은 칠곡에 위치한 본가에 잠시 들렀다가 발각돼 경찰에 체포된다. 3년여간의 옥살이 끝에 풀려난 그는 모진 옥고로 인해 1927년 끝내 숨을 거뒀다.
대구시 북구에 위치한 광복회 북구지회 건물. 이곳에서 만난 독립유공자 유족 이호(80)씨는 할아버지 사진을 들어 보이며 자랑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이 씨의 할아버지는 의열단 초창기 멤버로 만주와 국내에서 활약한 이수택 선생이다.
선생은 1910년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는 비극을 겪으며 19세의 나이에 독립운동가의 길을 걷게 된다. 3년여간 일합사 등 여러 독립운동 단체를 만들어 활동하다가 한계를 느낀 선생은 무력투쟁을 위해 만주로 올라갔다. 이때 그는 김원봉 등과 함께 항일비밀결사단체인 의열단 초창기 단원으로 활약해 만주에서 1년간 무기나 폭탄을 운반하고 주요 시설 폭파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의열단을 결성한 다음 해인 1920년에는 국내로 들어와 서울, 경성, 진주 등 각지를 돌아다니며 자금·무기 유통 등을 담당했다.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활발한 독립운동을 펼치던 이수택 선생은 칠곡에 위치한 본가에 잠시 들렀다가 발각돼 경찰에 체포된다. 3년여간의 옥살이 끝에 풀려난 그는 모진 옥고로 인해 1927년 끝내 숨을 거뒀다.
이 씨는 살아생전 조부인 이수택 선생을 본 적은 없었지만, 아버지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통해 당시 상황을 생생히 설명했다. 이 씨는 “당시 할아버지가 죽고 나서 마을 장으로 장례를 치르려고 했는데 경찰에서 못하게 막았다”며 “그래서 조용히 동네 사람들끼리 모여 장례식을 진행했다”고 말하며 당시 사진을 보여줬다.
이 씨는 가난했던 유년기도 생생히 기억했다. 이 씨는 “원래는 당시 동네에 3채 밖에 없던 기와집 중 하나가 우리 집이었는데 아무래도 할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하시다 보니 집이 가난해졌다”고 설명했다. 이어 “아침은 거의 못 먹었고 점심과 저녁은 매일 죽만 먹었다”며 “얼마나 영양가가 없는지 팔다리는 말랐는데 배만 불룩하게 나오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이씨는 힘든 유년기를 보냈지만, 항상 할아버지의 신조를 생각하며 살았다고 했다. 이 씨는 “아무리 어렵게 살더라도 남에게 구걸하며 살지 말라는 게 가훈”이라며 “그 신념 하나로 칠곡에서 대구로 살림을 옮긴 뒤에는 염색산업단지 등 공장 일대를 돌아다니며 살아왔다”고 설명했다.
현재 이 씨는 독립유공자 손자임에도 불구하고 관련 보상금을 받지 못하고 있다. 독립유공자 손자녀의 경우 1명만 매월 지급되는 보상금을 받을 수 있는데 사망할 경우 다른 형제에게 이전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씨의 경우 10여 년 전 세상을 떠난 형제가 보상금을 받았었다. 그런데도 이 씨는 전혀 불만을 내색하지 않고 오히려 할아버지의 명예를 기억해주었으면 한다고 전했다.
이 씨는 “나라에서 독립운동하셨던 어른들의 행적 관계라던지 명예에 관해 조금 더 관심을 가졌으면 한다”며 “독립운동하신 분들이 더 오래오래 기억돼야 그분들이 흘렸던 피와 땀이 값어치 있는 게 아니겠냐”고 말했다.
이 씨는 가난했던 유년기도 생생히 기억했다. 이 씨는 “원래는 당시 동네에 3채 밖에 없던 기와집 중 하나가 우리 집이었는데 아무래도 할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하시다 보니 집이 가난해졌다”고 설명했다. 이어 “아침은 거의 못 먹었고 점심과 저녁은 매일 죽만 먹었다”며 “얼마나 영양가가 없는지 팔다리는 말랐는데 배만 불룩하게 나오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이씨는 힘든 유년기를 보냈지만, 항상 할아버지의 신조를 생각하며 살았다고 했다. 이 씨는 “아무리 어렵게 살더라도 남에게 구걸하며 살지 말라는 게 가훈”이라며 “그 신념 하나로 칠곡에서 대구로 살림을 옮긴 뒤에는 염색산업단지 등 공장 일대를 돌아다니며 살아왔다”고 설명했다.
현재 이 씨는 독립유공자 손자임에도 불구하고 관련 보상금을 받지 못하고 있다. 독립유공자 손자녀의 경우 1명만 매월 지급되는 보상금을 받을 수 있는데 사망할 경우 다른 형제에게 이전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씨의 경우 10여 년 전 세상을 떠난 형제가 보상금을 받았었다. 그런데도 이 씨는 전혀 불만을 내색하지 않고 오히려 할아버지의 명예를 기억해주었으면 한다고 전했다.
이 씨는 “나라에서 독립운동하셨던 어른들의 행적 관계라던지 명예에 관해 조금 더 관심을 가졌으면 한다”며 “독립운동하신 분들이 더 오래오래 기억돼야 그분들이 흘렸던 피와 땀이 값어치 있는 게 아니겠냐”고 말했다.
Bay News Lab / 저작권자 (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