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8년 전. 한국에 갔을 때 일입니다. 큰 동생이랑 큰 동생 친구랑 우연히 식사를 같이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어릴 때 두어 번 보고 성인이 되어서 만난 동생친구로부터 얻어먹을 수 없지요. 몰래 나가서 계산을 했습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동생친구가 난리를 치더니 온다 간다 말도 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한참 동안 사라졌다가 돌아온 동생친구의 손에는 박스 하나가 들려있었습니다. 그 유명한 ‘밀양 얼음골 사과’였습니다. 추울 때 뜨뜻한 김이 올라오고 삼복더위에 얼음이 꽝꽝 어는 신비한 곳으로 이름난 밀양 얼음골에서 재배해 특산물로 지정되었다는 사과.
집에 와서 박스를 열어보니 명성 그대로입니다. 베어 물면 입안에 단물이 하나 가득 들어찰 것 같이 선홍색으로 윤이 좔좔 나는 게 얼마나 실하고 탐스러운지. 크기도 갓난애 머리통만 합니다. 친구들이 나 먹으라고 이것저것 사주면 열어도 보지않고 모두 올케 품에 안겨주던 나였지만 그 사과상자는 한켠에 고히 모셔놓았습니다. 무당친구가 사과를 좋아한다는 기억이 불현듯 떠올랐거든요.
며칠 후, 사과 상자를 서울로 가지고 올라갔습니다. 서울역에 도착해서 태산처럼 높은 계단을 올랐다가(무슨 똥고집에서인지 나는 에스컬레이터를 절대 타지 않습니다. 남편 말마따나 나는 나를 고문(torture)하는데 일가견이 있는 사람인 것 같아요)하염없이 또 내려가서 택시를 타는 곳까지 사과상자를 들고 가는데 무거워서 죽는 줄 알았네요. 또한 얼마나 거추장스럽던지요. 그냥 길에다가 확 던져버리고 싶었습니다.
저녁에 친구가 호텔로 나를 보러 왔습니다. 나는 갖은 고초를 겪으며 운반해 간 사과상자를 친구 앞에 내놓았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획득한 전리품을 보여주는 어린 병사처럼 의기양양하게 쨘~. 이게 웬일? 친구의 표정이 심드렁합니다. 썩 반가워하는 것 같지가 않아요. 알고 봤더니 친구가 매일이다시피 접하는 과일이 배와 사과. 굿 한 번씩 할 때마다, 기도에 들어갈 때마다, 치성을 드릴 때마다 제단에 차려놓는 게 바로 그런 과일이었던 것입니다. 어떤 땐 물량이 넘쳐 처치곤란이라 아는 사람들에게 택배로 보내준다고요. 아닌 게 아니라 언제 한 번 고모집에 갔을 때 봤어요. 친구가 택배로 보내주었다는 사과와 배, 북어, 그리고 약과 등이 거실 한 쪽에 쌓여있는 것을. 어릴 때, 우리 가난할 때, 사과 하나를 맘 놓고 못 사먹을 때만 생각했던 나는 그냥 머쓱해져버렸습니다.
이번 한국 방문은 전적으로 친구를 위한 것입니다. 지난 봄에 갔을 때 뜸이랑 뜸 기구랑 한약 등 내게 필요한 것들은 다 구입해 왔었고 비행기 타는 일이 몸에 부쳐 당분간은 한국방문을 자제해야겠다고 결심했던 내가 다시 비행기표를 끊은 것은 오로지 아픈 친구를 봐야겠다는 일념 하나였습니다. 그런데요. 친구는 자기 몸보다 나를 먼저 생각하고 있었네요. 열 두번으로 계획된 항암도 간수치가 너무 올라 제대로 맞지도 못하고 있으면서 친구는 내게 한 한의원에 반드시 가 볼 것을 강권했습니다. 뜸, 침, 약, 양약 등 온갖 요법에도 나의 냉증이 치료되지 않고 답보 상태라는 게 너무너무 큰 걱정이 된다면서 이번에는 제발 자기 말을 들어보라는 것입니다. 점사를 보러오는 자기 손님들 중에 아픈 사람이 더러 있었는데 그 한의원에서 많은 차도를 봤다면서.
금방이라도 비를 뿌릴 듯 컴컴하고 음산하게 하늘이 내려앉아 있던 9월의 어느날 오전. 나는 호텔에 짐도 제대로 풀지 못한 채 친구의 손에 이끌려 한의원에 갔습니다. 아니, 이끌렸다기보다는 내가 친구를 이끌었다고해야 옳습니다. 친구는 걸음을 제대로 걷지 못했어요. 항암하면서 제대로 먹지를 못해 몸무게가 20키로 가까이 빠졌다고 했습니다. 몸무게가 빠질 때 근육도 같이 빠지나 봐요. 옆에서 누가 부축하지 않으면 자력으로 걷는 걸 힘들어했습니다.
이틀간 침을 두 번 맞긴 했지만 나는 큰 기대를 걸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한국에서 미국에서 침을 수십차례 맞아봤지만 효과가 전무했기에. 그렇지만 고집을 피우지 않고 순순하게 말을 들었던 것은 그렇게라도 해 줘야 친구 마음이 편할 거라는 생각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나! 효과가 있습니다. 당일이나 이튿날까지는 전혀 차도가 없었던 몸이 고향에 내려가 있는 동안 조금씩 달라진 것입니다. 냉골같이 차디차던 양팔에 조금씩 온기가 돌기 시작해요! 무릎부터 허벅지까지 빙글빙글 돌아다니던 얼음 덩어리도 작아진 것 같고요. 침 놓는 사람과 맞는 사람의 궁합이 맞아야 효과를 본다더니 그 한의사의 침이 나랑 맞는 것 같아요. 얼마나 신기하던지요.
출국 전까지 몇 번 더 맞으면 좋을 것 같았는데 시간은 많았습니다만 서울로 올라가는 기차표가 없습니다. 여기저기 동분서주하면서 알아봤지만 전부 매진. 추석 연휴를 계산 못한 나의 실수였습니다. 코가 석자나 빠진 채 하릴없이 시간만 보내다가 출국 사흘을 앞두고 가까스로 표를 구했습니다. 서울역에서 내려서 바로 한의원으로 향했지요. 친구 딸이 나를 에스코트해 주었습니다. 친구는 다행히 간수치가 정상으로 내려와서 다시 항암치료 하느라 병원에 들어가 있답니다. 방향감각이라곤 없어 사방팔방 헤맬 것이 분명한 나를 걱정해서 자기 옆에서 병간호하던 딸을 보내준 거지요.
침을 맞고 나서 점심을 먹으러 가기 위해 횡단보도에 섰는데 한국에 도착하던 후부터 내내 찌푸드하던 하늘에서 갑자기 햇빛이 찬란하게 내리쬡니다. 보름 만에 처음 보는 햇빛. 반가운 햇빛. 그 햇빛을 얼굴에 받으며 나는 엉엉 울었습니다. 친구 딸이 한 말 때문입니다. “엄마가 이모가 좋아하는 음식을 대접하라고 했는데요. 이모가 국수나, 팥죽이나 짬뽕을 좋아할 거라고 하셨어요. 요 앞 시장통에 가면 잔치국수를 아주 잘하는 집이 있고요. 팥칼국수와 팥죽으로 유명한 집도 있어요. 어디로 갈까요?”
자기 몸이 그 지경이면서도 관심사가 온통 내게로 향해 있는 친구. 내 식성까지 꿰뚫고 살뜰하게 챙기고 있는 친구. 맞습니다. 국수, 팥죽, 짬뽕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입니다. 사실 나는 친구가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 전혀 모릅니다. 내 알 바가 아니었던(위에 쓴 대로 사과를 좋아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세월 따라 상황 따라 사과는 제쳐놓게 되었고)거지요. 그동안 나는 말만 친구였지 그녀에 대해서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네요. 친구가 나를 사랑한 만큼 나는 친구를 사랑하지 않았네요. 그게 미안하고 고맙고 후회스러워서 사람들이 쳐다보든지 말든지 횡단보도 앞에서 엉엉 울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계숙 작가
집에 와서 박스를 열어보니 명성 그대로입니다. 베어 물면 입안에 단물이 하나 가득 들어찰 것 같이 선홍색으로 윤이 좔좔 나는 게 얼마나 실하고 탐스러운지. 크기도 갓난애 머리통만 합니다. 친구들이 나 먹으라고 이것저것 사주면 열어도 보지않고 모두 올케 품에 안겨주던 나였지만 그 사과상자는 한켠에 고히 모셔놓았습니다. 무당친구가 사과를 좋아한다는 기억이 불현듯 떠올랐거든요.
며칠 후, 사과 상자를 서울로 가지고 올라갔습니다. 서울역에 도착해서 태산처럼 높은 계단을 올랐다가(무슨 똥고집에서인지 나는 에스컬레이터를 절대 타지 않습니다. 남편 말마따나 나는 나를 고문(torture)하는데 일가견이 있는 사람인 것 같아요)하염없이 또 내려가서 택시를 타는 곳까지 사과상자를 들고 가는데 무거워서 죽는 줄 알았네요. 또한 얼마나 거추장스럽던지요. 그냥 길에다가 확 던져버리고 싶었습니다.
저녁에 친구가 호텔로 나를 보러 왔습니다. 나는 갖은 고초를 겪으며 운반해 간 사과상자를 친구 앞에 내놓았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획득한 전리품을 보여주는 어린 병사처럼 의기양양하게 쨘~. 이게 웬일? 친구의 표정이 심드렁합니다. 썩 반가워하는 것 같지가 않아요. 알고 봤더니 친구가 매일이다시피 접하는 과일이 배와 사과. 굿 한 번씩 할 때마다, 기도에 들어갈 때마다, 치성을 드릴 때마다 제단에 차려놓는 게 바로 그런 과일이었던 것입니다. 어떤 땐 물량이 넘쳐 처치곤란이라 아는 사람들에게 택배로 보내준다고요. 아닌 게 아니라 언제 한 번 고모집에 갔을 때 봤어요. 친구가 택배로 보내주었다는 사과와 배, 북어, 그리고 약과 등이 거실 한 쪽에 쌓여있는 것을. 어릴 때, 우리 가난할 때, 사과 하나를 맘 놓고 못 사먹을 때만 생각했던 나는 그냥 머쓱해져버렸습니다.
이번 한국 방문은 전적으로 친구를 위한 것입니다. 지난 봄에 갔을 때 뜸이랑 뜸 기구랑 한약 등 내게 필요한 것들은 다 구입해 왔었고 비행기 타는 일이 몸에 부쳐 당분간은 한국방문을 자제해야겠다고 결심했던 내가 다시 비행기표를 끊은 것은 오로지 아픈 친구를 봐야겠다는 일념 하나였습니다. 그런데요. 친구는 자기 몸보다 나를 먼저 생각하고 있었네요. 열 두번으로 계획된 항암도 간수치가 너무 올라 제대로 맞지도 못하고 있으면서 친구는 내게 한 한의원에 반드시 가 볼 것을 강권했습니다. 뜸, 침, 약, 양약 등 온갖 요법에도 나의 냉증이 치료되지 않고 답보 상태라는 게 너무너무 큰 걱정이 된다면서 이번에는 제발 자기 말을 들어보라는 것입니다. 점사를 보러오는 자기 손님들 중에 아픈 사람이 더러 있었는데 그 한의원에서 많은 차도를 봤다면서.
금방이라도 비를 뿌릴 듯 컴컴하고 음산하게 하늘이 내려앉아 있던 9월의 어느날 오전. 나는 호텔에 짐도 제대로 풀지 못한 채 친구의 손에 이끌려 한의원에 갔습니다. 아니, 이끌렸다기보다는 내가 친구를 이끌었다고해야 옳습니다. 친구는 걸음을 제대로 걷지 못했어요. 항암하면서 제대로 먹지를 못해 몸무게가 20키로 가까이 빠졌다고 했습니다. 몸무게가 빠질 때 근육도 같이 빠지나 봐요. 옆에서 누가 부축하지 않으면 자력으로 걷는 걸 힘들어했습니다.
이틀간 침을 두 번 맞긴 했지만 나는 큰 기대를 걸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한국에서 미국에서 침을 수십차례 맞아봤지만 효과가 전무했기에. 그렇지만 고집을 피우지 않고 순순하게 말을 들었던 것은 그렇게라도 해 줘야 친구 마음이 편할 거라는 생각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나! 효과가 있습니다. 당일이나 이튿날까지는 전혀 차도가 없었던 몸이 고향에 내려가 있는 동안 조금씩 달라진 것입니다. 냉골같이 차디차던 양팔에 조금씩 온기가 돌기 시작해요! 무릎부터 허벅지까지 빙글빙글 돌아다니던 얼음 덩어리도 작아진 것 같고요. 침 놓는 사람과 맞는 사람의 궁합이 맞아야 효과를 본다더니 그 한의사의 침이 나랑 맞는 것 같아요. 얼마나 신기하던지요.
출국 전까지 몇 번 더 맞으면 좋을 것 같았는데 시간은 많았습니다만 서울로 올라가는 기차표가 없습니다. 여기저기 동분서주하면서 알아봤지만 전부 매진. 추석 연휴를 계산 못한 나의 실수였습니다. 코가 석자나 빠진 채 하릴없이 시간만 보내다가 출국 사흘을 앞두고 가까스로 표를 구했습니다. 서울역에서 내려서 바로 한의원으로 향했지요. 친구 딸이 나를 에스코트해 주었습니다. 친구는 다행히 간수치가 정상으로 내려와서 다시 항암치료 하느라 병원에 들어가 있답니다. 방향감각이라곤 없어 사방팔방 헤맬 것이 분명한 나를 걱정해서 자기 옆에서 병간호하던 딸을 보내준 거지요.
침을 맞고 나서 점심을 먹으러 가기 위해 횡단보도에 섰는데 한국에 도착하던 후부터 내내 찌푸드하던 하늘에서 갑자기 햇빛이 찬란하게 내리쬡니다. 보름 만에 처음 보는 햇빛. 반가운 햇빛. 그 햇빛을 얼굴에 받으며 나는 엉엉 울었습니다. 친구 딸이 한 말 때문입니다. “엄마가 이모가 좋아하는 음식을 대접하라고 했는데요. 이모가 국수나, 팥죽이나 짬뽕을 좋아할 거라고 하셨어요. 요 앞 시장통에 가면 잔치국수를 아주 잘하는 집이 있고요. 팥칼국수와 팥죽으로 유명한 집도 있어요. 어디로 갈까요?”
자기 몸이 그 지경이면서도 관심사가 온통 내게로 향해 있는 친구. 내 식성까지 꿰뚫고 살뜰하게 챙기고 있는 친구. 맞습니다. 국수, 팥죽, 짬뽕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입니다. 사실 나는 친구가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 전혀 모릅니다. 내 알 바가 아니었던(위에 쓴 대로 사과를 좋아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세월 따라 상황 따라 사과는 제쳐놓게 되었고)거지요. 그동안 나는 말만 친구였지 그녀에 대해서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네요. 친구가 나를 사랑한 만큼 나는 친구를 사랑하지 않았네요. 그게 미안하고 고맙고 후회스러워서 사람들이 쳐다보든지 말든지 횡단보도 앞에서 엉엉 울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계숙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