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동네에서 같이 자란 서른몇 명의 친구들이 있습니다. 그중 한국 나갈 때마다 만나는 가까운 친구로는 희주, 미연이, 영선이, 그리고 남자친구 종국이와 창기가 있습니다. 창기는 삼십몇 년 동안 소식을 모르다가 몇 년 전, 내가 스마트폰을 가지게 되면서 연락이 닿았습니다. 오랫동안 안부를 모르고 지냈었지만 긴긴 세월의 강을 빠르게, 쉽게 뛰어넘을 수 있었어요. 창기와 내가 가진 공통점 때문에. 여자가 하나인 4남매라는 공통점. 동생 하나가 일찍 세상을 떠난 아픔을 가지고 있다는 공통점. 지지리도 가난한 가정에서 자랐다는 공통점. 그리고 창기 부모와 내 부모가 막역하게 지냈었어요. 두 사람 연배가 같았거든요. 직장에 다니던 창기 아버지는 퇴근 후엔 반드시 우리 집에 들렀다 가곤 했었어요. 내 막냇동생이 태어났을 때 창기 엄마가 우리 집에 와서 엄마의 산후 회복을 도왔던 기억이 납니다. 한때 우리 집에서 돼지를 많이 키웠었는데 창기집에 쌀뜨물을 가지러 가는 일은 내 담당이었습니다. 쌀뜨물이 돼지의 빠른 성장에 도움이 된대요.
작년 겨울, 창기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형이 운영하는 신문사에서 일하기로 했답니다. 창립한지 20년 가까이 된 경기도 소재의 제법 큰 신문사랍니다. 그러나 여러 사업에 바쁜 형의 손길이 제대로 미치치 못한 신문사가 갈수록 침체 일로에 빠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기에게 신문사를 다시 활성화하라는 중책을 맡겼다는 것입니다. 한 대학 서무과에서 일하다 퇴직한 후 낮에는 테니스 치고 밤에는 막걸리 마시는 유유자적한 생활을 즐기던 창기였습니다. 다시 일을 한다는 게, 그리고 생판 모르는 신문사에서 일을 한다는 게 별로 내키지는 않지만 하나밖에 없는 형의 엄명이라 어쩔 수 없었답니다. 창기가 말했습니다. 어찌 되었건 이왕 맡았으니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해봐야겠다고. 그러면서 내게 부탁을 합니다. 칼럼을 하나 열자고.
어느 신문이나 매일매일의 기사와 사진은 대동소이합니다. 예를 들어 살인사건이 났다. 이 신문도 이 살인 기사, 저 신문도 살인 기사입니다. 특별할 게 없습니다. 그래서 차별화를 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그 차별화란 다른 신문에 없는 칼럼. 같은 내용의 칼럼을 이 신문 저 신문에 싣지는 못하지요. 딱 그 신문에서만 읽을 수 있는 칼럼으로 독창성을 두는 것.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자연히 내 생각이 났다는 것입니다.
나는 심드렁하게 대꾸했습니다. 글쎄, 내 글은 아줌마들 잡담 수준의 내용들인데 그 신문사의 편집방향과 맞을까. 사실 별 흥미가 없었어요. 이 미시유에스에이 말고도 중앙일보에 5백회 동안 칼럼을 썼었고 지금도 북가주에서 발행하는 ‘현대 뉴스’란 매체에 글을 쓰고 있기에요. 새로운 데 다시 칼럼을 연다는 것은 내가 아무리 은퇴해서 시간이 넘쳐난다해도, 새 글을 쓰는 게 아니라 예전 글을 좀 손봐서 싣는다해도, 한 달에 네 번은 조금 무리였습니다. 창기가 재촉했습니다. 일단 몇 달만 해보자. 해보다가 정 힘들면 중단해도 되잖아. 신문사 부흥이라는 역사적인 사명을 짊어진 나를 좀 도와 줘라.
그렇게해서 열게 된 것이 ‘미국 아줌마의 수다’입니다. 매주 금요일마다 종이신문과 웹사이트에 업로드됩니다. 칼럼명은 내가 정했습니다. 지식과 학식으로 무장되어 있을 경기도민들에게 충격을 주고 싶지 않았거든요. 그동안 읽어왔던 칼럼들과 전혀 성격이 다른 내 칼럼에 엥? 이게 뭐야?하는 충격말입니다. ‘수다’라고 미리 못을 박아놓으면 아무래도 미리 준비를 하지 않겠어요. 음. 말 그대로 수다 수준의 가벼운 글이구나. 그냥 심심풀이로 읽으면 되는 글이구나.
처음 한 달간은 신문사 웹사이트에 들어가보지도 않(못)았어요. 뭐라 그럴까. 내 글의 반응을 보는 게 조심스러워서였다고 할까. 위에도 썼지만 아무래도 미국 동포들과 한국에 사는 사람들은 사고방식도 생활철학도 글에 대한 취향도 많이 다를 겁니다. 여기선 독자들의 열광을 받는 글이라 해도 한국에서는 그렇지 않을 거라는 두려움이 좀 있었던 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 내 글이 ‘열독률 뉴스’ 섹션의 상위에 떠있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말이지요. 이 놀랍고도 기쁜 소식을 혼자만 알고 있을 수 없습니다. 동네방네 소문냈습니다. 그 뒤로는 매주 글을 올리고는 웹사이트에 들어가 확인을 해보는 배짱이 생겼는데요. 내 글이 항상 상위에 올라가 있습니다. 일등 아니면 이등.
이유가 뭘까요. 수준 높은 칼럼들이 넘쳐날 텐데 그들을 다 제치고 내 글이 경기도민들에게도 ‘먹히는’ 이유가 뭘까요. 내 글엔 늘 사람이 등장하기 때문이랍니다. 이같은 분석은 여기 북가주의 한 교수가 한 것입니다. 교훈도 철학도 깊이도 없는 이계숙의 글을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유는 ‘사람에 관한 글’이기 때문이라고. 그렇습니다. 나, 남편, 옆집, 이웃, 할배들, 한국의 친구들, 하다못해 길가는 홈리스까지. 정치, 문화, 경제, 사회같이 고차원적이고 어려운 주제가 아니라 사람입니다. 사람에게 ‘다른 사람’은 늘 흥미의 대상이요, 새로운 대상이요, 특별한 대상이지요. 이계숙의 글에는 늘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 사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계숙 작가
작년 겨울, 창기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형이 운영하는 신문사에서 일하기로 했답니다. 창립한지 20년 가까이 된 경기도 소재의 제법 큰 신문사랍니다. 그러나 여러 사업에 바쁜 형의 손길이 제대로 미치치 못한 신문사가 갈수록 침체 일로에 빠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기에게 신문사를 다시 활성화하라는 중책을 맡겼다는 것입니다. 한 대학 서무과에서 일하다 퇴직한 후 낮에는 테니스 치고 밤에는 막걸리 마시는 유유자적한 생활을 즐기던 창기였습니다. 다시 일을 한다는 게, 그리고 생판 모르는 신문사에서 일을 한다는 게 별로 내키지는 않지만 하나밖에 없는 형의 엄명이라 어쩔 수 없었답니다. 창기가 말했습니다. 어찌 되었건 이왕 맡았으니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해봐야겠다고. 그러면서 내게 부탁을 합니다. 칼럼을 하나 열자고.
어느 신문이나 매일매일의 기사와 사진은 대동소이합니다. 예를 들어 살인사건이 났다. 이 신문도 이 살인 기사, 저 신문도 살인 기사입니다. 특별할 게 없습니다. 그래서 차별화를 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그 차별화란 다른 신문에 없는 칼럼. 같은 내용의 칼럼을 이 신문 저 신문에 싣지는 못하지요. 딱 그 신문에서만 읽을 수 있는 칼럼으로 독창성을 두는 것.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자연히 내 생각이 났다는 것입니다.
나는 심드렁하게 대꾸했습니다. 글쎄, 내 글은 아줌마들 잡담 수준의 내용들인데 그 신문사의 편집방향과 맞을까. 사실 별 흥미가 없었어요. 이 미시유에스에이 말고도 중앙일보에 5백회 동안 칼럼을 썼었고 지금도 북가주에서 발행하는 ‘현대 뉴스’란 매체에 글을 쓰고 있기에요. 새로운 데 다시 칼럼을 연다는 것은 내가 아무리 은퇴해서 시간이 넘쳐난다해도, 새 글을 쓰는 게 아니라 예전 글을 좀 손봐서 싣는다해도, 한 달에 네 번은 조금 무리였습니다. 창기가 재촉했습니다. 일단 몇 달만 해보자. 해보다가 정 힘들면 중단해도 되잖아. 신문사 부흥이라는 역사적인 사명을 짊어진 나를 좀 도와 줘라.
그렇게해서 열게 된 것이 ‘미국 아줌마의 수다’입니다. 매주 금요일마다 종이신문과 웹사이트에 업로드됩니다. 칼럼명은 내가 정했습니다. 지식과 학식으로 무장되어 있을 경기도민들에게 충격을 주고 싶지 않았거든요. 그동안 읽어왔던 칼럼들과 전혀 성격이 다른 내 칼럼에 엥? 이게 뭐야?하는 충격말입니다. ‘수다’라고 미리 못을 박아놓으면 아무래도 미리 준비를 하지 않겠어요. 음. 말 그대로 수다 수준의 가벼운 글이구나. 그냥 심심풀이로 읽으면 되는 글이구나.
처음 한 달간은 신문사 웹사이트에 들어가보지도 않(못)았어요. 뭐라 그럴까. 내 글의 반응을 보는 게 조심스러워서였다고 할까. 위에도 썼지만 아무래도 미국 동포들과 한국에 사는 사람들은 사고방식도 생활철학도 글에 대한 취향도 많이 다를 겁니다. 여기선 독자들의 열광을 받는 글이라 해도 한국에서는 그렇지 않을 거라는 두려움이 좀 있었던 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 내 글이 ‘열독률 뉴스’ 섹션의 상위에 떠있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말이지요. 이 놀랍고도 기쁜 소식을 혼자만 알고 있을 수 없습니다. 동네방네 소문냈습니다. 그 뒤로는 매주 글을 올리고는 웹사이트에 들어가 확인을 해보는 배짱이 생겼는데요. 내 글이 항상 상위에 올라가 있습니다. 일등 아니면 이등.
이유가 뭘까요. 수준 높은 칼럼들이 넘쳐날 텐데 그들을 다 제치고 내 글이 경기도민들에게도 ‘먹히는’ 이유가 뭘까요. 내 글엔 늘 사람이 등장하기 때문이랍니다. 이같은 분석은 여기 북가주의 한 교수가 한 것입니다. 교훈도 철학도 깊이도 없는 이계숙의 글을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유는 ‘사람에 관한 글’이기 때문이라고. 그렇습니다. 나, 남편, 옆집, 이웃, 할배들, 한국의 친구들, 하다못해 길가는 홈리스까지. 정치, 문화, 경제, 사회같이 고차원적이고 어려운 주제가 아니라 사람입니다. 사람에게 ‘다른 사람’은 늘 흥미의 대상이요, 새로운 대상이요, 특별한 대상이지요. 이계숙의 글에는 늘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 사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계숙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