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이 부인, 한국전 직후 결혼한 뒤 도미한 한인
남편이 쓰던 참전용사 모자 들고 나와 메달 수여
“메달 받는다는 생각에 눈물…한국 정부에 깊이 감사”
김한일 SF한인회장 노력으로 메달 전달될 수 있어
“관할 구역 아니다” 이유로 메달 전수 늦어져 ‘아쉬움’
“남편이 살아생전 메달을 받았다면 정말 좋아하셨을 겁니다. 비록 돌아가셨지만 지금이라도 메달을 받아 정말 기쁘고 행복합니다.”
6월 14일 샌프란시스코 시청에서 개최된 한미동맹 70주년을 기념행사에서 한국전 참전 용사인 지미 브레이 씨를 대신해 메달을 전달받은 부인 엘리자베스 브레이 씨가 밝힌 소감이다. 1934년 생인 지미 브레이 참전용사는 지난해 11월 88세를 일기로 작고했다.
특히 고 지미 브레이 씨의 부인인 엘리자베스 브레이 씨는 한국전 직후 브레이 씨와 결혼한 뒤 미국으로 건너온 한인으로 알려져 큰 관심을 받았다. 브레이 부인의 한국이름은 장민정이다. 브레이 부인은 남편의 이름이 호명되자 살아생전 남편이 즐겨 쓰던 참전용사 모자를 들고 나와 메달을 받으며 눈시울을 붉혔다.
지미 브레이 씨는 한국전 참전을 계기로 한국을 사랑하게 됐다고 한다. 1951년 육군에 입대한 브레이 씨는 전쟁이 막바지인 1953년 한국에 파병됐다. 한국전쟁이 휴전된 뒤에도 한국에 머물던 브레이 씨는 1954년 미육군 군무원으로 일하던 장민정 씨를 만나 이듬해 결혼 했다. 1955년 발령을 받아 미국으로 돌아온 브레이 씨는 한국에서 다시 근무하기 위해 몬트레이 프리시디오 육군 언어학교에 입학해 한국어를 배웠다.
한국어 공부를 마친 뒤 1959년 다시 한국으로 발령을 받았고 월남전이 발발한 뒤인 1967년에는 베트남으로 파병돼 전투에 참가했다. 하지만 전투 중 큰 부상을 입게 됐고 한국으로 후송됐다. 브레이 부인에 따르면 남편인 지미 브레이 씨가 한국행을 원해 이뤄진 것이라고 한다. 브레이 씨는 월남전에서의 공적이 인정돼 1968년 퍼플훈장을 전수 받았다.
브레이 씨는 부상에도 불구하고 한국 근무를 또 자청했다. 결국 이 요청은 받아들여졌고 월남전에서 돌아온 지 2년만인 1970년 다시 한국으로 발령을 받았다. 이번엔 UN군 소속으로 판문점에서 근무를 했다. 이후 3년을 더 복무했고 1973년 상사로 예편했다.
“남편은 정말 한국을 사랑했죠. 미국에 있을 때에도 프리시디오 육군 언어학교에서 한국어를 공부했고 다시 한국 근무를 자처했습니다. 월남전에서 부상을 입은 뒤 미국에 돌아와서도 다시 한국에 가길 원했고 판문점에서도 근무를 했습니다. 한국어도 정말 잘 했어요”라고 브레이 부인은 회상했다.
브레이 씨의 한국 사랑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전쟁 직후 어려운 환경속에 처해 있던 한국 아이들을 3명이나 입양했다. 브레이 부인은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당시만해도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라 아이들을 키우기 어려운 가정이 많았죠. 그래서 남편과 함께 한국 아이들을 입양해 키우게 됐어요”라고 설명했다. 그 때 입양됐던 아이들은 어느덧 손자들을 둔 할아버지가 됐고 20여 명이 넘는 대가족을 이루게 됐다. 브레이 부인은 “잘 자라준 아이들이 너무나 고맙죠”라고 말했다.
6월 14일 샌프란시스코 시청에서 개최된 한미동맹 70주년을 기념행사에서 한국전 참전 용사인 지미 브레이 씨를 대신해 메달을 전달받은 부인 엘리자베스 브레이 씨가 밝힌 소감이다. 1934년 생인 지미 브레이 참전용사는 지난해 11월 88세를 일기로 작고했다.
특히 고 지미 브레이 씨의 부인인 엘리자베스 브레이 씨는 한국전 직후 브레이 씨와 결혼한 뒤 미국으로 건너온 한인으로 알려져 큰 관심을 받았다. 브레이 부인의 한국이름은 장민정이다. 브레이 부인은 남편의 이름이 호명되자 살아생전 남편이 즐겨 쓰던 참전용사 모자를 들고 나와 메달을 받으며 눈시울을 붉혔다.
지미 브레이 씨는 한국전 참전을 계기로 한국을 사랑하게 됐다고 한다. 1951년 육군에 입대한 브레이 씨는 전쟁이 막바지인 1953년 한국에 파병됐다. 한국전쟁이 휴전된 뒤에도 한국에 머물던 브레이 씨는 1954년 미육군 군무원으로 일하던 장민정 씨를 만나 이듬해 결혼 했다. 1955년 발령을 받아 미국으로 돌아온 브레이 씨는 한국에서 다시 근무하기 위해 몬트레이 프리시디오 육군 언어학교에 입학해 한국어를 배웠다.
한국어 공부를 마친 뒤 1959년 다시 한국으로 발령을 받았고 월남전이 발발한 뒤인 1967년에는 베트남으로 파병돼 전투에 참가했다. 하지만 전투 중 큰 부상을 입게 됐고 한국으로 후송됐다. 브레이 부인에 따르면 남편인 지미 브레이 씨가 한국행을 원해 이뤄진 것이라고 한다. 브레이 씨는 월남전에서의 공적이 인정돼 1968년 퍼플훈장을 전수 받았다.
브레이 씨는 부상에도 불구하고 한국 근무를 또 자청했다. 결국 이 요청은 받아들여졌고 월남전에서 돌아온 지 2년만인 1970년 다시 한국으로 발령을 받았다. 이번엔 UN군 소속으로 판문점에서 근무를 했다. 이후 3년을 더 복무했고 1973년 상사로 예편했다.
“남편은 정말 한국을 사랑했죠. 미국에 있을 때에도 프리시디오 육군 언어학교에서 한국어를 공부했고 다시 한국 근무를 자처했습니다. 월남전에서 부상을 입은 뒤 미국에 돌아와서도 다시 한국에 가길 원했고 판문점에서도 근무를 했습니다. 한국어도 정말 잘 했어요”라고 브레이 부인은 회상했다.
브레이 씨의 한국 사랑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전쟁 직후 어려운 환경속에 처해 있던 한국 아이들을 3명이나 입양했다. 브레이 부인은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당시만해도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라 아이들을 키우기 어려운 가정이 많았죠. 그래서 남편과 함께 한국 아이들을 입양해 키우게 됐어요”라고 설명했다. 그 때 입양됐던 아이들은 어느덧 손자들을 둔 할아버지가 됐고 20여 명이 넘는 대가족을 이루게 됐다. 브레이 부인은 “잘 자라준 아이들이 너무나 고맙죠”라고 말했다.
고 지미 브레이 씨가 한미동맹 70주년 행사에서 ‘평화의 사도 메달’을 받을 수 있었던 데에는 김한일 샌프란시스코 한인회장의 역할이 컸다. 평소 자신이 운영하던 치과에 환자로 방문하던 지미 브레이 씨가 우연한 기회에 한국전 참전용사라는 것을 알게 됐고 샌프란시스코 총영사관에 알려 메달을 받게 한 것.
하지만 아쉬운 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박준용 총영사 시절 지미 브레이 씨가 참전용사라는 점을 샌프란시스코 총영사관에 알렸지만 지미 브레이 씨가 거주하는 지역이 산타바버라여서 관할지역이 아니라는 이유로 메달 수여를 거부한 것이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났고 코로나 팬데믹이 끝난 뒤 김한일 회장이 샌프란시스코 총영사관에 다시 부탁을 했고 한미동맹 70주년 행사에서 ‘평화의 사도 메달’이 전달 될 수 있었다. 샌프란시스코 총영사관에서 조금 더 관심을 기울였다면 지미 브레이 씨가 작고하기 전 메달을 받을 수 있지 않았을까 아쉬움이 남는다.
브레이 여사는 “남편에게 평화의 사도 메달이 전달된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며 “남편이 살아서 메달을 받았다면 정말 좋아했을 것”이라고 밝혔다. 브레이 여사는 “잊지 않고 메달을 전해준 한국정부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메달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준 김한일 회장님께도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쉬운 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박준용 총영사 시절 지미 브레이 씨가 참전용사라는 점을 샌프란시스코 총영사관에 알렸지만 지미 브레이 씨가 거주하는 지역이 산타바버라여서 관할지역이 아니라는 이유로 메달 수여를 거부한 것이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났고 코로나 팬데믹이 끝난 뒤 김한일 회장이 샌프란시스코 총영사관에 다시 부탁을 했고 한미동맹 70주년 행사에서 ‘평화의 사도 메달’이 전달 될 수 있었다. 샌프란시스코 총영사관에서 조금 더 관심을 기울였다면 지미 브레이 씨가 작고하기 전 메달을 받을 수 있지 않았을까 아쉬움이 남는다.
브레이 여사는 “남편에게 평화의 사도 메달이 전달된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며 “남편이 살아서 메달을 받았다면 정말 좋아했을 것”이라고 밝혔다. 브레이 여사는 “잊지 않고 메달을 전해준 한국정부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메달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준 김한일 회장님께도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