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특집] SF 위안부 기림비 4주년① 위안부 기림비 건립 어떻게 시작됐나

샌프란시스코 세인트 메리스 스퀘어에 세워진 샌프란시스코 위안부 기림비. 사진 위안부정의연대 제공.
베이뉴스랩은 미국 대도시 가운데 최초로 건립된 샌프란시스코 위안부 기림비 건립 4주년을 맞아, 기림비 건립 계획부터 제막식이 열리기까지의 과정을 다시 한번 되짚어보는 특집을 마련했다. 위안부 기림비가 왜 세워지게 됐는지, 어떤 과정을 거쳐 건립됐는지를 살펴보며 샌프란시스코 위안부 기림비가 갖는 의미를 조명해본다. <편집자주>

► ‘일본의 우경화’로 시작된 기림비 건립 그리고 아베 신조의 등장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에 의해 자행됐던 위안부 강제동원 사실은 1991년 8월 14일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으로 세상에 공개됐다. 김학순 할머니는 당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사무실에서 일본군 위안부 실상을 증언하고 일본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이후 일본은 자체 조사를 벌인 뒤 1993년 8월, 당시 일본 관방장관이던 고노 요헤이가 2차대전 당시 위안부 동원에 일본 정부가 직·간접적으로 관여했음을 인정하는 담화문을 발표하게 된다.

고노 담화는 이후 일본 정부의 공식 입장으로 받아들여져 왔지만, 이러한 기조는 2012년 아베 신조 총리가 취임하며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일본 우익을 대표하는 정치인이었던 아베 신조는 집권 이후 자국 내 정치적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일본군 위안부와 강제징용 등 과거사를 부정하고 역사를 왜곡하기 시작했으며, 군대를 가지지 못하도록 규정한 ‘평화 헌법’을 개정하기 위해 ‘독도’, ‘댜오위다오(중국명·일본명 센카쿠 열도)’ 등 영토 분쟁도 본격화했다. 이는 자연스럽게 한국과 중국 등 주변국들과 마찰을 빚으며 갈등이 심화되는 계기가 됐다.

과거사 부정, 역사 왜곡, 영토 분쟁 등 일본의 우익화 바람은 한국과 중국 등 동북아 지역에 국한되지 않고 미국 내 한인 커뮤니티와 중국 커뮤니티에서도 일본에 대한 저항과 반발을 불러왔다.

미주 지역 한인 커뮤니티들은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일본에 맞서 ‘독도 지키기’에 힘을 모아 나섰다. 북가주를 비롯해 LA 지역에서도 ‘독도는 한국 땅’이라는 광고가 등장했고 집회도 열렸다. LA에서는 일본 총영사관이 독도 광고판 철거를 요구하자, 이에 반발한 한인들이 일본 총영사관 앞으로 몰려가 항의 집회를 열기도 했다. 뉴욕, 시카고, 애틀랜타 등 한인들이 거주하는 지역에서는 동시다발적인 반발 움직임이 이어졌다.

북가주에서는 김진덕·정경식 재단이 나서 ‘독도 이름 되찾기’ 캠페인을 시작했다. 김진덕·정경식 재단 김한일 대표는 구글 지도에서 ‘독도’라는 이름이 사라지고 분쟁 지역을 뜻하는 ‘리앙쿠르섬’이라는 표기가 등장한 것을 처음 발견하고, ‘독도’ 이름을 되찾자며 대대적인 운동을 펼쳤다. 일본 정부의 로비 등으로 세계 최대 IT 기업마저도 한국의 영토를 분쟁 지역으로 표기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고, 이에 맞서 미주 한인들은 서명운동을 벌이며 저항했다.

중국 커뮤니티의 분위기도 심상치 않았다. 미국 내에서 중국인들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샌프란시스코 지역에서는 2013년경 ‘항일 박물관’ 건설 논의가 시작됐고, 2차대전 당시 일본이 자행했던 ‘난징 대학살’ 기념관을 건립해 일제의 만행을 알려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여기에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이후 경제적으로 어려워진 미국을 대신해 일본이 군사적으로 중국을 견제하겠다고 나서면서, 중국 커뮤니티 내 반일 감정은 더욱 깊어졌다.

이와 맞물려 2013년 5월 당시 오사카 시장이던 하시모토 도루가 “일본군 위안부는 강압적인 것이 아니었다”는 발언을 하며 이미 고조돼 있던 반일 분위기에 기름을 부었다. 하시모토 도루 시장은 이후에도 방송 등에 출연해 자신의 발언이 정당하다고 주장하며 사과는커녕 정당성을 강조해 큰 반발을 샀다. 당시 오사카와 자매도시 관계였던 샌프란시스코 시에서는 한국계 시의원이던 제인 김(Jane Kim)이 나서 하시모토 도루 오사카 시장의 망언에 대한 사과를 촉구하는 결의문이 발의되기도 했다.

미국에서 위안부 소녀상이 세워지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무렵이다. 하시모토 도루 오사카 시장의 망언이 있은 지 약 3개월 뒤 글렌데일에 ‘평화의 소녀상’이 세워졌고, 약 1년여 뒤에는 미시건주에도 ‘평화의 소녀상’이 들어섰다. 이후 평화의 소녀상 건립은 미주 전역으로 확산됐다.

이 시기 북가주에서는 밀피타스 시의회가 ‘위안부 결의안’을 통과시키며 일본의 역사 왜곡 움직임에 일침을 놓았다. 밀피타스 시의회는 ‘위안부 결의안’에 이어 ‘평화의 소녀상’ 건립을 추진했지만, 일본 정부와 미국 내 일본 커뮤니티의 거센 반발에 직면하며 결국 소녀상 건립은 무산됐다. 당시 호세 에스테베스 밀피타스 시장을 비롯한 시의원들은 결의안 통과 이후 일본 극우 세력들로부터 협박성 내용을 포함한 항의 이메일을 대거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 극우화로 치닫는 일본 정부… 위안부 강제동원 인정한 ‘고노 담화’까지 부정

한국과 중국은 물론 미국 내에서도 여러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지만, 일본의 과거사 부정과 역사 왜곡 움직임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하시모토 도루 오사카 시장 등 일부 정치인들의 망언에 그치지 않고, 일본 정부가 직접 나서 역사 왜곡에 앞장서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그동안 일본의 공식 입장으로 여겨졌던 ‘고노 담화’마저 부정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한국과 중국 등 일본 제국주의 피해 당사국은 물론 미국 행정부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지만, 아베 총리가 이끄는 일본 정부는 고노 담화 검증에 착수했고 2014년 6월 “강제 동원은 확인할 수 없었다”는 결론을 발표했다.

일본 정부의 이러한 발표는 이미 고조돼 있던 반일 감정을 폭발시키는 계기가 됐다. 한국과 중국은 물론 미국 내에서도 거센 반발이 일어났다. 북가주 지역에서는 중국 커뮤니티가 먼저 움직였다. 샌프란시스코 다운타운 중심가에 ‘위안부 기림비’를 세워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항일 박물관’, ‘난징 대학살 기념관’ 논의에 이어 위안부 기림비 건립 논의도 본격화됐다.

기림비 건립 계획은 샌프란시스코에 거주하는 중국계가 중심이 된 세계항일전쟁사실 유지·보호연합회와 중국계 상인 단체인 화상총회가 주축이 돼 시작됐다. 취재 과정에서 이들 단체 사무실과 여러 차례 접촉했지만 언어 장벽 등으로 소통에 어려움이 있었고, 이후 여러 경로를 통해 세인트 메리스 스퀘어에 위안부 기림비 건립을 추진한다는 계획이 알려졌다.

이 계획을 전한 한 중국계 단체 관계자는 한인 커뮤니티의 도움도 필요하다며 한인 단체들의 참여를 요청했다. 이 내용은 한인 단체들에 전달됐고 참여 의사를 밝힌 곳도 있었지만, 실제로 기림비 건립 과정에 참여한 한인 단체는 없었다.

아쉽지만 샌프란시스코 위안부 기림비 건립은 이처럼 중국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시작됐다.


최정현 기자 / choi@baynewsla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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