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린턴 행정부 외교의 중추적 역할…북한 비핵화 문제도 깊이 관여
11세에 미국온 체코 이민자의 딸…'어메리칸 드림' 상징이자 개척자
미국 최초의 여성 국무장관이자 미국 장관으로서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했던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국무장관이 지병인 암으로 별세했다. 향년 84세.
워싱턴포스트와 CNN 등 외신은 23일 올브라이트 전 장관의 가족을 인용해 이같이 보도했다. 체코 이민자 출신으로 11세 때 미국에 발을 들인 올브라이트 전 장관은 남성 이 대다수를 차지했던 미국 외교계에 새 전기를 마련한 인물로 평가된다.
소녀 마리아 야나 코르벨은 1937년 5월 15일 체코의 수도 프라하의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났다. 훗날 어머니가 현재의 이름 매들린으로 개명했다. 나치와 공산 정권을 피해 외교관이었던 아버지와 함께 미국으로 넘어왔다.
여성 명문 웰슬리대에서 정치학을 공부한 뒤 부유한 언론사 후계자 조셉 메딜 페터슨 올브라이트와 결혼한 뒤 조지타운 사교계의 구심으로 인맥을 구축했다. 컬럼비아대학원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밑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브레진스키가 카터 행정부 시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에 임명되며 그와 함께 웨스트윙에 입성했다.
1982년 이혼 이후 본격적으로 정계에 발을 들여 여성 정치인들을 후원하기 시작했고, 이 과정에 빌 클린턴 당시 아칸소 주지사와도 인연을 맺었다. 미소 냉전 종식 시점부터 2001년 9·11 테러 발생 즈음인 빌 클린턴 행정부 시절 외교·안보 정책의 중추적인 역할을 맡았다.
그는 클린턴 행정부 1기(1993~1997) 때 유엔 주재 미국 대사를 맡았고, 2기(1997~2001년) 임기 때는 외교 정책을 총괄하는 첫 여성 국무장관 자리에 올랐다. 그의 상원 인준안 투표는 99대0, 초당적인 만장일치로 이뤄졌다.
올브라이트 전 장관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의 확장을 옹호하고 발칸반도의 집단학살을 막기 위해 동맹의 개입을 촉구해온 인사로도 통한다. 또 핵무기 확산 억제를 추구하며 전 세계의 인권과 민주주의를 옹호한 인물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유엔 대사 재직 시절부터 TV 카메라 앞에서 거침없고 친숙한 모습으로 대중에게 다가가 미국인들의 뇌리에 자리잡기도 했다.
올브라이트 전 장관은 특히 북한 비핵화 문제에도 깊숙이 관여했다. 국무장관 재임 시절인 1999년 미국이 이른바 대북 포용을 기조로 한 ‘페리 프로세스’를 발표하며 북미 관계는 점차 해빙기에 접어들었고, 같은 달 9월에는 대북 경제 제재 완화 조치가 발표됐다.
올브라이트 전 장관은 2000년 7월 방콕에서 열린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을 계기로 백남순 당시 북한 외무상과 회동해 북미 고위급간 교류에 물꼬를 텄다. 이어 같은해 10월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특사로 방미한 조명록과 논의 끝에 적대관계 종식, 평화보장 체제 수립, 미 국무장관 방북 등 내용을 골자로 하는 북미 공동코뮈니케 발표를 이끌었다.
또 북한 측과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까지 타진했고, 이를 성사시키기 위해 실제로 그해 10월 23~25일 미국 장관으로는 처음으로 평양을 찾았다. 현재 웬디 셔먼 미 국무부 부장관이 올브라이트 전 장관 밑에서 대북정책조정관을 지냈다. 셔먼 부장관은 당시 코뮈니케 작성 및 평양 방문 등에도 동행했다.
올브라이트 전 장관은 퇴임 이후에도 외교계 원로로서 최근까지 남북 관계를 비롯한 현안에 활발하게 의견을 개진해 왔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외교·안보 정책에도 신랄한 비판을 가했다. 2018년에는 저서 ‘파시즘’을 출간, 북한을 세속적인 ‘ISIS(이슬람 국가·극단주의 무장조직)’에 비유하기도 했다.
고인의 별세 소식에 각계는 애도를 표했다.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은 “올브라이트 전 장관의 별세에 가슴이 아프다”며 “그는 ‘어메리칸 드림’의 상징이었고, 다른 사람들이 이를 깨닫도록 도왔다”고 추도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은 유럽 방문 도중 이 같은 소식을 전달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린다 토마스-그린필드 유엔주재 미국 대사는 고인을 ‘개척자이자 전문가’라고 애도했다.
조지타운대에서 올브라이트 전 장관을 사사한 네드 프라이스 국무부 대변인은 브리핑에서 “그가 이 건물에 미친 영향은 매일 매일, 모든 구석에서 느껴진다”며 “그는 첫번째 여성 국무장관으로서 선구자였고, 말 그대로 문을 열었다”고 말했다.
워싱턴포스트와 CNN 등 외신은 23일 올브라이트 전 장관의 가족을 인용해 이같이 보도했다. 체코 이민자 출신으로 11세 때 미국에 발을 들인 올브라이트 전 장관은 남성 이 대다수를 차지했던 미국 외교계에 새 전기를 마련한 인물로 평가된다.
소녀 마리아 야나 코르벨은 1937년 5월 15일 체코의 수도 프라하의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났다. 훗날 어머니가 현재의 이름 매들린으로 개명했다. 나치와 공산 정권을 피해 외교관이었던 아버지와 함께 미국으로 넘어왔다.
여성 명문 웰슬리대에서 정치학을 공부한 뒤 부유한 언론사 후계자 조셉 메딜 페터슨 올브라이트와 결혼한 뒤 조지타운 사교계의 구심으로 인맥을 구축했다. 컬럼비아대학원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밑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브레진스키가 카터 행정부 시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에 임명되며 그와 함께 웨스트윙에 입성했다.
1982년 이혼 이후 본격적으로 정계에 발을 들여 여성 정치인들을 후원하기 시작했고, 이 과정에 빌 클린턴 당시 아칸소 주지사와도 인연을 맺었다. 미소 냉전 종식 시점부터 2001년 9·11 테러 발생 즈음인 빌 클린턴 행정부 시절 외교·안보 정책의 중추적인 역할을 맡았다.
그는 클린턴 행정부 1기(1993~1997) 때 유엔 주재 미국 대사를 맡았고, 2기(1997~2001년) 임기 때는 외교 정책을 총괄하는 첫 여성 국무장관 자리에 올랐다. 그의 상원 인준안 투표는 99대0, 초당적인 만장일치로 이뤄졌다.
올브라이트 전 장관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의 확장을 옹호하고 발칸반도의 집단학살을 막기 위해 동맹의 개입을 촉구해온 인사로도 통한다. 또 핵무기 확산 억제를 추구하며 전 세계의 인권과 민주주의를 옹호한 인물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유엔 대사 재직 시절부터 TV 카메라 앞에서 거침없고 친숙한 모습으로 대중에게 다가가 미국인들의 뇌리에 자리잡기도 했다.
올브라이트 전 장관은 특히 북한 비핵화 문제에도 깊숙이 관여했다. 국무장관 재임 시절인 1999년 미국이 이른바 대북 포용을 기조로 한 ‘페리 프로세스’를 발표하며 북미 관계는 점차 해빙기에 접어들었고, 같은 달 9월에는 대북 경제 제재 완화 조치가 발표됐다.
올브라이트 전 장관은 2000년 7월 방콕에서 열린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을 계기로 백남순 당시 북한 외무상과 회동해 북미 고위급간 교류에 물꼬를 텄다. 이어 같은해 10월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특사로 방미한 조명록과 논의 끝에 적대관계 종식, 평화보장 체제 수립, 미 국무장관 방북 등 내용을 골자로 하는 북미 공동코뮈니케 발표를 이끌었다.
또 북한 측과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까지 타진했고, 이를 성사시키기 위해 실제로 그해 10월 23~25일 미국 장관으로는 처음으로 평양을 찾았다. 현재 웬디 셔먼 미 국무부 부장관이 올브라이트 전 장관 밑에서 대북정책조정관을 지냈다. 셔먼 부장관은 당시 코뮈니케 작성 및 평양 방문 등에도 동행했다.
올브라이트 전 장관은 퇴임 이후에도 외교계 원로로서 최근까지 남북 관계를 비롯한 현안에 활발하게 의견을 개진해 왔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외교·안보 정책에도 신랄한 비판을 가했다. 2018년에는 저서 ‘파시즘’을 출간, 북한을 세속적인 ‘ISIS(이슬람 국가·극단주의 무장조직)’에 비유하기도 했다.
고인의 별세 소식에 각계는 애도를 표했다.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은 “올브라이트 전 장관의 별세에 가슴이 아프다”며 “그는 ‘어메리칸 드림’의 상징이었고, 다른 사람들이 이를 깨닫도록 도왔다”고 추도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은 유럽 방문 도중 이 같은 소식을 전달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린다 토마스-그린필드 유엔주재 미국 대사는 고인을 ‘개척자이자 전문가’라고 애도했다.
조지타운대에서 올브라이트 전 장관을 사사한 네드 프라이스 국무부 대변인은 브리핑에서 “그가 이 건물에 미친 영향은 매일 매일, 모든 구석에서 느껴진다”며 “그는 첫번째 여성 국무장관으로서 선구자였고, 말 그대로 문을 열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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