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년 전 5·18민주화운동의 아픈 역사가 시공간을 넘어 군부의 쿠데타에 저항하며 미얀마에서 재현되고 있다.
미얀마 시위와 5·18 민주화운동은 그 시작부터 비슷했다. 군사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군부에 저항하고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시민들이 분연히 일어선 ‘민주 항쟁‘이었다.
미얀마 군부는 지난해 11월 선거에서 군부와 연계된 남성 중심의 통합단결발전당(USDP)이 아웅산 수치 고문이 이끄는 민주주의 민족동맹(NLD)에 대패하자 선거 조작이라며 쿠데타를 일으켰다.
5·18 민주화운동 역시 12·12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전두환 신군부에 항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다만 미얀마의 경우 수도인 양곤과 제2도시 만달레이 등 전국적인 시위가 벌어지고 있지만, 5·18은 함께 시위하기로 했던 타지역의 침묵과 신군부의 철저한 통제로 광주 홀로 외로운 싸움을 해야 했다.
시민들의 불복종 운동이 격화되자 이를 진압하는 군부의 만행도 5·18 당시의 상황과 닮아있다. 진압군은 자국민을 향해 총구를 겨누는 것도 모자라, 비무장 시민들을 향해 집단 발포해 수십명의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미얀마 시민단체인 정치범지원협회(AAPP)는 지난달 1일 쿠데타 발생부터 9일 동안 1천857명이 체포됐고, 60명 이상이 사망했다고 밝혔다. 5·18 역시 10일간의 항쟁 기간 집단 발포와 민간인 학살 등으로 165명이 숨진 것으로 잠정 집계됐다.
잔혹한 진압 작전에 자국의 특수부대가 동원된 것도 5·18과 비슷한 점이다. 미얀마는 소수민족 반군들과 교전하던 정예부대인 33경보병사단을 비롯해 잔혹하기로 유명한 77경보병사단 등을 투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두환 신군부 역시 80년 광주에 특수부대인 제3·7·11공수여단을 투입해 잔혹한 진압 작전의 선봉에 세웠다.
양 국의 진압군들은 시위에 참여한 사람은 물론, 관련이 없는 사람들까지 무차별 체포하면서 소총 개머리판이나 곤봉 등으로 잔혹하게 폭행하거나 고문을 자행하는 잔혹한 모습을 보였다.
군부가 언론을 통제하며 이러한 사실은 은폐하거나 왜곡하는 것도 동일한 행태다. 사망자 수를 축소하거나 사망 원인으로 외부인 개입설을 주장하는 것도 닮은 꼴이다. 특히 미얀마에선 지난 3일 시위 도중 총탄에 머리를 맞아 숨진 치알 신의 시신을 도굴한 흔적이 발견됐는데 군부가 증거를 지우기 위해 탄환을 빼간 것 아니냐는 의혹이 일었다.
실제 이러한 일이 벌어진 날 오전 군사정부가 운영하는 신문들은 “치알 신이 실탄을 맞았으면 머리가 망가졌을 것“이라며 “경찰의 무기에 의해 부상했을 개연성이 낮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5·18 당시 전두환 신군부도 마찬가지였다. 군경이 쏜 총탄(M-16)에 숨진 시신을 부검하면서 시민군이 소지하고 있던 총탄(칼빈)에 숨진 것처럼 허위 검시 보고서를 작성한 사실이 뒤늦게 드러난 바 있다.
또 언론을 통제하며 외부와의 연락을 차단, 시민들을 ‘폭도‘로 왜곡해 군부의 잔혹한 진압을 ‘어쩔 수 없는 자위권 행사‘로 정당화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5·18은 1988년 이른바 ‘광주 청문회‘를 통해 세상에 알려지기까지 8년 동안 폭동이라는 오명을 써야 했다.
다만 고립된 광주와 달리 미얀마는 시위대가 각종 휴대기기로 촬영한 영상을 SNS로 공유하며 국제사회에 미얀마의 엄혹한 상황을 조금이나마 전할 수 있는 상황이다. 이를 통해 미얀마의 상황을 알게 된 국제사회는 군부의 잔혹한 진압 행위를 규탄하고 유무형의 압력을 행사하고 있다.
5·18 단체 관계자는 “인터넷에 올라온 미얀마 영상을 보면 5·18 당시의 상황이 떠올라 고통스럽기도 하지만 그래서 더욱 가만히 있을 수 없는 것“이라며 “미얀마인들의 민주항쟁이 승리할 수 있도록 어떤 형태로든 돕고 싶다“고 말했다.
앞서 5·18 기념재단을 비롯한 5·18 관련 단체와 광주 시민사회단체들은 잇따라 미얀마 군부를 규탄하고 미얀마 시위에 대해 지지 성명을 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