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목월 시인 미발표 시 290편 공개…“이밤에 어디서 자나 슈샨보이”

장남 자택·경주 동리목월문학관 보관 중이던
친필노트 80권에 담겨…시인 작고 46년 만에
“기존 시풍과 다른 작품 다수…한국시문학사 새로 써야”

박목월 시인의 생전 모습. 한양대 제공.
“6·25 때 / 엄마 아빠가 다 돌아가신 / 슈샨보이. / 길모퉁이의 구두를 닦는 슈샨·보이 (중략) 이밤에 어디서 자나 슈샨·보이 / 비가 오는데, 잠자리나 마련 했을가. 슈샨·보이”

박목월 시인이 말년인 1970년대에 쓴 ‘슈샨보오이’라는 시의 일부다. 슈샨보이 또는 슈샨보오이는 구두닦이 소년(shoeshine boy)을 뜻한다.

한국의 대표적인 서정시인으로 손꼽히는 박목월(1915~1978)이 193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쓴 미발표 시 290편이 고인이 남긴 노트들에서 발견됐다. 6·25 때 부모를 잃고서 생업 전선에 뛰어든 가난한 구두닦이 소년에게 느낀 절절한 연민을 담은 ‘슈샤인보오이’도 그중 하나다.

박목월유작품발간위원회(위원장 우정권 단국대 교수)는 12일(한국시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박 시인의 장남 박동규(85) 서울대 명예교수(국문학)가 자택에 소장한 노트 62권과 경북 경주 동리목월문학관에서 보관 중인 18권의 노트에 담긴 박 시인의 미발표 육필 시들을 공개했다. 이 시들은 시인이 1930년대 후반부터 말년인 1970년대까지 쓴 총 318편으로, 기존에 발표된 시들을 제외하면 총 290편이다. 미발표 작품 공개는 시인이 작고한 지 46년만이다.

박 교수는 “아버님이 남긴 노트들은 20년 전까지 살아계셨던 어머니가 생전에 지극정성으로 관리하셨고, 어머님 사후 오랫동안 보자기에 싸인 채 보관돼왔던 것들”이라면서 “오랜 시간 그것들을 꺼내 정리할 엄두를 내지 못했는데 이렇게 후배와 제자들의 도움으로 공개하게 됐다”고 말했다. 시인의 아내이자 박 교수의 모친인 고 유익순 여사는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 치하의 서울에 남아 있을 때도 천장과 지붕에 남편인 박목월의 창작 노트들을 숨겨 보관했다고 박 교수는 회고했다.
박목월 시인 장남인 박동규 서울대학교 명예교수가 12일 오전(한국시간)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박목월 시인 미발표 육필 시 공개 기자회견에 앞서 박목월 시인 육필 시 노트를 들어보이고 있다. 이날 박목월 유작품 발간위원회는 박동규 교수 자택에서 발견된 박목월 시인 미발표 시 290편 가운데 166편을 선별해 공개했다.
유작품발간위는 이날 미발표 원고 가운데 문학적 완성도가 높고 주제가 다양하며 창작의 변화 과정이 잘 드러난 작품 166편을 선별해 우선 공개했다. 시기별로는 1936년, 1939년으로 창작 연도가 표기된 작품을 포함해 1950년대의 제주를 소재로 한 시들, 1960년대 사람들의 일상적 삶을 노래한 작품, 역사적 격동기였던 해방과 한국전쟁 등에 관해 시인이 작고 직전인 1970년대에 창작한 시편들이 포함됐다. 초기작인 1939년작 ‘모춘'(暮春)은 시어를 선택하고 수정하는 과정이 노트에 고스란히 담겨 있어 박목월의 초기 시 창작과정을 짐작케 하는 시다.

한국전쟁 직후인 1950년대 후반에 쓴 ‘폐원’에서 시인은 서울 정동의 돌층계에서 추억의 사람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노래했다. 이 외에도 ‘눈물’, ‘1958’ 등 1950년대에 쓴 시편들에서는 슬픔과 상실의 정서가 흐른다. 시인은 말년인 1970년대에는 6·25와 해방, 근대 등을 노래했다. 기존에 알려진 그의 시풍과는 상당히 결이 다른 작품들이 많다.

“아아 눈이 동그랗게 아름다운 그대 슈샨 보이 / 학교 길에 내일도 만날가 그애 슈샨보이.”(시 ‘슈샨보오이’ 마지막 부분)

한국전쟁에서 부모를 모두 잃고 길거리로 나서 구두닦이로 살아가는 소년을 보고서 느낀 연민을 노래한 ‘슈샨보오이’는 이 시기의 대표적인 미발표 작품 중 하나로, 한국전쟁의 참혹함을 서정적인 어조로 그렸다. 이밖에 박목월은 생활과 일상, 기독교 신앙, 가족과 어머니, 사랑, 제주와 경주, 동심, 시인으로서의 삶을 다룬 시들과 기념시와 헌시 등 다양한 작품들을 노트에 남겼다.

“햐얀 구름 / 동동 / 여름도 안 갔는데 / 그 콩꼬투리 / 맺었을 까 하고 / 아기 산비둘기 / 엿보고 가고”라고 노래한 동시 ‘콩꼬투리’ 등 완성된 형태의 동시 30여 편도 발견됐다. 박목월은 동요로 유명한 ‘얼룩송아지’ 등 많은 동시를 남긴 바 있다.

유작품발간위는 미발표 시들이 “시의 산문적 형식, 역사적 격변기인 해방과 전쟁, 종군문인단 활동, 조국과 미래를 위한 희망, 내면적 슬픔과 상실의 실체 등이 이번 발굴된 작품에 나타난 박목월 문학의 새로움이었다”고 설명했다. 이들은 이번 미공개 작품 발굴과 연구에 따라 한국문학사를 새로 써야 할 수도 있다는 의견을 조심스럽게 밝혔다.

우정권 단국대 교수는 “목월의 시풍을 목가적이고 서정적인 측면으로 많이 알고 계시는데, 이번에 발굴된 것들에는 그렇지 않다고 볼 수 있는 작품이 상당히 많다”면서 “한국 시문학사를 다시 써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향후 젊고 유능한 연구자들의 연구가 더 필요할 것 같다”고 말했다.

유작품발간위에는 우 교수를 필두로 방민호 서울대 교수, 박덕규 단국대 명예교수, 유성호 한양대 교수, 전소영 홍익대 초빙교수 등 다수의 국문학자가 참여했다. 이들은 지난해 8월부터 본격적으로 박 시인의 육필 노트에 적힌 원고들을 활자화하고 분류·분석하는 작업을 진행해왔다.

유작품발간위는 이번에 발견된 시들을 추가로 연구해 육필 노트를 널리 공개하고, 박목월 전집과 평전 간행, 시 낭송 페스티벌 등 박목월의 문학세계를 널리 알리는 활동을 다각적으로 벌일 계획이다. ‘나그네’, ‘청노루’, ‘이별가’, ‘윤사월’ 등의 대표작을 남긴 박목월은 한국 시문학의 대표적인 작가로 손꼽히는 서정시인이자 교육자다. 주로 자연을 소재로 한 서정시를 많이 썼으며 조지훈, 박두진과 함께 해방 직후 시집 ‘청록집’을 펴내 청록파 시인으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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