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나 한국에서나 문 밖에를 잘 안 나가는 성격이긴 하지만 이번 한국방문에서는 그야말로 ‘집콕’을 해야 했습니다. 몸이 아프니까 뭘 할 의욕이 없었어요. 올케가 출근하고나면 아무도 없는 집에서 하루종일 책 보면서 누워있었습니다. 동생집에 책은 무진장으로 있었거든요. 책 보는 일 외에 몸에 좋다는 것들을 챙겨먹는 일이 있었네요. 큰동생이 해다 준 흑염소, 천안에서 미연이가 부쳐 준 흑마늘, 대구 영선이가 갖다 준 홍삼진액, 그리고 올케가 미리 주문해 놓은 생강꿀. 흑염소는 아침저녁으로 하루에 두 번 먹으라고 했었지만 사흘이 지났는데도 전혀 효과가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아침 점심 저녁, 하루에 세 번으로 늘였습니다. 기름이 많아서 배탈이 날 수도 있다고 했지만 ‘배탈’이 문제가 아니었어요. 어떻게해서든지 조금이라도 몸이 나아야 했으니까요. 몸이 나아질 수만 있다면 정말이지 영혼이라도 팔고 싶었습니다. 너무 고통스러우니까. 하루에도 몇 번씩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을 적시는 식은 땀만 안 나도 살겠는데.
내가 그렇게 힘든 상태에 놓인 줄 모르는 친구들이 밥을 사주겠다며 한 시간씩 운전해서 나를 찾아 왔습니다. 어째요. 나가야지. 진통제를 먹고 나갔습니다. 그리고 무조건 ‘장어’를 먹자고 했어요. 예전같으면 건드리지도 않았을 장어. 장어가 쇠약해진 몸을 보호하는 식품으로 최고라는 정보를 인터넷에서 보았거든요. 진즉 그렇게 몸을 생각했어야 했는데.
한국에 도착한 지 나흘 째 되던 토요일, 고향친구들과의 모임에는 참석해야 했습니다. 발전과 개발이라는 명목 아래 다 파헤쳐지고 뚫려지고 사라지고 뒤집어진 고향 마을에 아직도 건재한 느티나무가 한 그루 있어요. 그 나무 아래 모여서 점심을 먹고 난 후 한 카페에서 인원점검을 마치고 부산으로 내려가는 일정이랍니다. 지난 봄에 만난 이후 몇 개월만에 다시 모인 친구들은 바다가 보이는 근사한 풍경의 ‘펜션’에서 하룻밤을 보낸다고 했습니다만 나는 그 펜션 근처에서 부산친구와 만나기로 계획을 잡았어요. 그러니까 고향친구들도 보고 부산친구도 만나는 일석이조의 계획.
최근 고향 언덕에 들어선 ‘카페’에 모인 친구들은 커피들을 마시고 기념사진을 찍으면서 다시 만난 반가움을 나누었어요. 그런 후 부산으로 출발했습니다. 나를 포함해 열 서너명이 차 세 대에 나누어 타고. 나는 종국이의 차에 탔는데 나 외에 미연이, 창기, 그리고 미수가 있었습니다.
인원 확인을 한 후 신나게 차를 출발시킨지 이십여 분, 고속도로에 마악 들어서는데 갑자기 내 옆에 앉았던 미연이가 외마디 비명을 지릅니다. 천안에서 내려오면서 들고 온 짐가방을 기차역에 마중 나왔던 친구 원호의 차에 두고 왔다는 겁니다. 당장 돌아가서 짐가방을 가져와야 한답니다. 갈아입을 옷이랑 세면도구가 다 들었다면서. 미연이 말에 조수석에 앉은 미수가 얼른 다른 차에 탄 한 친구에게 전화를 겁니다. 얼른 차를 돌려서 원호차에 있는 미연이 짐가방을 가져 오라고. 상대방이 알았다고 순순히 대답하는 것 같습니다. 운전하던 종국이가 말합니다. 고속도로에 진입하기 전이라서 참 다행이군. 우리처럼 벌써 고속도로에 진입했다면 돌아가는데 한참 시간이 걸렸을 텐데…
나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 누구도 미연이의 부주의에 대해 불평을 안 하는 거예요. 몸이 아프니 만사가 귀찮아서 입을 다물고 있었습니다만 평소의 나라면 반드시 걸고 넘어갔을 겁니다. 일단은 ‘여자가 왜 그렇게 칠칠맞냐’고 지청구를 했을 거고요. 차가 출발했는데 돌아가서 가져오긴 뭘 가져오냐고. 부산에 가서 세면도구를 다시 사면 되지 않냐고 단호하게 말했을 겁니다.
놀랄 일은 또 일어났습니다. 부산 도착을 이십여분 앞두고 미연이가 배가 아프답니다. 휴게소에 들러야 한답니다. 종국이가 미수에게 말합니다. 인터넷으로 휴게소까지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찾아보라고. 미수는 종국이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전화기를 들여다 봅니다. 차는 곧 속도를 높히더니 십분 쯤 후 휴게소 건물 앞에 바짝 다가가서 섰습니다. 평소의 나 같았으면 또 한 마디 했겠지요. 곧 도착인데 급한 설사가 아니면 조금 참으라고요. ‘너는 어딜 가나 말썽’이라고 덧붙였겠지요. 그런데 차에 탄 그 누구도 짜증을 내지 않습니다. 한국남자들이 참 많이 변했습니다.
그 법석을 떨면서 펜션에 도착했습니다. 나는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던 부산친구 부부와 합류하면서 고향친구들과는 작별했어요. 부산친구가 나를 위해 선별해 놓은 바닷가의 근사한 한정식집에서 저녁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광열이가 ‘미국친구’를 열댓명이 같이 뒹굴어야하는 펜션에서 재울 수 없다면서 특별히 예약해 놓은 호텔로 가기로 했습니다. 하루 숙박에 천 불 가까이 하는 ‘파이브 스타급’ 호텔이랍니다.
오랜만에 만난 부산친구와 수다를 떨면서 호텔로 이동하는 중에 또 놀랄 일이 생겼습니다. 부산친구한테 미연이가 전화를 했어요. 자기도 ‘파이브 스타 호텔’에 한 번 자봐야겠으니 돌아와서 자기를 태우고 가랍니다. 엄마야! 차를 출발시킨 지가 벌써 삼십여분, 호텔이 지측에 있습니다. 2,3 분이면 도착할 거리에. 그런데 다시 돌아가라고?! 내가 옆에서 난리를 쳤습니다. 우리랑 합류하려면 진즉 하든지 이제 다 도착했는데 다 늦게 뭐하는 거냐고?! 오려면 택시 타고 오라고! 그런데요. 운전하던 부산친구 남편이 나를 손짓으로 만류합니다. 괜찮다고. 다시 돌아가면 된다고. 그러면서 급히 차를 돌립니다. 우리는 다시 삼십여분을 돌아가서 미연이를 태우고 왔습니다. 나는 감탄했습니다. 한국남자들의 배려심이 참 대단하구나! 정말로 모두들 자상하고 순하고 착하구나!
부산에 도착한 날 밤 한 번, 그리고 다음 날 오전에 한 번, 두 번의 식사자리에서도 ‘한국남자’의 세심함과 자상함을 보았습니다. 부산친구와 나는 그냥 손놓고 먹기만 하고요. 부산친구 남편이 연신 찌개를 떠 주고 물을 따라주고 먹기 좋게 반찬을 밀어 줍니다. 나는 너무 신기해서 부산친구 남편의 얼굴을 한참이나 쳐다보았습니다. 한국남자들은 여전히 제왕행세를 하는 줄 알았거든요. 여성에 대한 배려와 양보와 대접을 전혀 할 줄 모르는. 왜냐면 30여년 전, 내가 한국을 떠나올 땐 그랬으니까. 가만히 앉아서 고개짓으로 물, 담배, 재떨이 심부름을 시키는. 다방에 커피를 마시러 가도 여성이 먼저 남자 잔에 설탕과 크림을 타서 건네 주는 걸 당연시 하는.
외국에 사는 교포들은 한국을 떠난 그 시절에 사고가 머물러 있다는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고보니 내가 그랬네요. 한국에 사는 사람들의 의식구조는 하루가 바쁘게 급변하는데 나 혼자 먼 옛날, 내가 한국을 떠날 때의 그 순간에 머물러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한국남자들은 봉건적이고 고지식하고 무례하고 권위적이고 보수적이라는 생각에요.
늘 그랬듯이 내가 출국하기 전에 머무는 서울의 한 호텔로 무당친구가 왔습니다. 무당친구는 만사 대충대충, 허술하기 짝이 없는 나를 대신해 늘 꼼꼼하게 내 가방을 싸줍니다. 그런데요. 이번에는 무당친구가 방에 들어서자 마자 들고 온 베낭에서 뭘 주섬주섬 꺼냅니다. 울긋불긋 온갖 색들이 어우러진 큰 천같은 건데요. 내가 말릴 새도 없이 그 천을 내 머리위에 확 덮고는 뭐라고 중얼중얼 주문같은 걸 외웁니다. 그리고는 그 천을 한 줄씩 쫙쫙 찢어요. 내가 몸이 안 좋다니까 무당친구가 특별히 해 준 ‘의식’이랍니다. 미국들어갈 동안 아무 문제없도록, 그리고 도착해서 하루빨리 기력 회복하기를 기원해주는. 나야 물론 그런 걸 안 믿지요. 그렇지만 마음 써준 친구의 마음이 고마왔습니다.
길게 찢어놓은 천을 보는데 순간 머릿속에 반짝, 전깃불이 켜진 것처럼 기발한 아이디어 하나가 떠오릅니다. 나는 울긋불긋한 그 천을 내 가방 두 개의 손잡이에 묶었어요. 컨테이너에서 마구 돌아가가는 고만고만한 수백개의 시커먼 가방들 속에 내 가방을 찾는 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라서요. 아니나 다를까,울긋불긋 요란한 색의 천이 묶인 내 가방은 금방 눈에 뜨였습니다. 어렵지않게 가방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무당친구의 의식덕분인지 무사히 집에 잘 도착했고 몸은 조금씩 잘 회복되고 있습니다.
이계숙 작가
내가 그렇게 힘든 상태에 놓인 줄 모르는 친구들이 밥을 사주겠다며 한 시간씩 운전해서 나를 찾아 왔습니다. 어째요. 나가야지. 진통제를 먹고 나갔습니다. 그리고 무조건 ‘장어’를 먹자고 했어요. 예전같으면 건드리지도 않았을 장어. 장어가 쇠약해진 몸을 보호하는 식품으로 최고라는 정보를 인터넷에서 보았거든요. 진즉 그렇게 몸을 생각했어야 했는데.
한국에 도착한 지 나흘 째 되던 토요일, 고향친구들과의 모임에는 참석해야 했습니다. 발전과 개발이라는 명목 아래 다 파헤쳐지고 뚫려지고 사라지고 뒤집어진 고향 마을에 아직도 건재한 느티나무가 한 그루 있어요. 그 나무 아래 모여서 점심을 먹고 난 후 한 카페에서 인원점검을 마치고 부산으로 내려가는 일정이랍니다. 지난 봄에 만난 이후 몇 개월만에 다시 모인 친구들은 바다가 보이는 근사한 풍경의 ‘펜션’에서 하룻밤을 보낸다고 했습니다만 나는 그 펜션 근처에서 부산친구와 만나기로 계획을 잡았어요. 그러니까 고향친구들도 보고 부산친구도 만나는 일석이조의 계획.
최근 고향 언덕에 들어선 ‘카페’에 모인 친구들은 커피들을 마시고 기념사진을 찍으면서 다시 만난 반가움을 나누었어요. 그런 후 부산으로 출발했습니다. 나를 포함해 열 서너명이 차 세 대에 나누어 타고. 나는 종국이의 차에 탔는데 나 외에 미연이, 창기, 그리고 미수가 있었습니다.
인원 확인을 한 후 신나게 차를 출발시킨지 이십여 분, 고속도로에 마악 들어서는데 갑자기 내 옆에 앉았던 미연이가 외마디 비명을 지릅니다. 천안에서 내려오면서 들고 온 짐가방을 기차역에 마중 나왔던 친구 원호의 차에 두고 왔다는 겁니다. 당장 돌아가서 짐가방을 가져와야 한답니다. 갈아입을 옷이랑 세면도구가 다 들었다면서. 미연이 말에 조수석에 앉은 미수가 얼른 다른 차에 탄 한 친구에게 전화를 겁니다. 얼른 차를 돌려서 원호차에 있는 미연이 짐가방을 가져 오라고. 상대방이 알았다고 순순히 대답하는 것 같습니다. 운전하던 종국이가 말합니다. 고속도로에 진입하기 전이라서 참 다행이군. 우리처럼 벌써 고속도로에 진입했다면 돌아가는데 한참 시간이 걸렸을 텐데…
나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 누구도 미연이의 부주의에 대해 불평을 안 하는 거예요. 몸이 아프니 만사가 귀찮아서 입을 다물고 있었습니다만 평소의 나라면 반드시 걸고 넘어갔을 겁니다. 일단은 ‘여자가 왜 그렇게 칠칠맞냐’고 지청구를 했을 거고요. 차가 출발했는데 돌아가서 가져오긴 뭘 가져오냐고. 부산에 가서 세면도구를 다시 사면 되지 않냐고 단호하게 말했을 겁니다.
놀랄 일은 또 일어났습니다. 부산 도착을 이십여분 앞두고 미연이가 배가 아프답니다. 휴게소에 들러야 한답니다. 종국이가 미수에게 말합니다. 인터넷으로 휴게소까지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찾아보라고. 미수는 종국이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전화기를 들여다 봅니다. 차는 곧 속도를 높히더니 십분 쯤 후 휴게소 건물 앞에 바짝 다가가서 섰습니다. 평소의 나 같았으면 또 한 마디 했겠지요. 곧 도착인데 급한 설사가 아니면 조금 참으라고요. ‘너는 어딜 가나 말썽’이라고 덧붙였겠지요. 그런데 차에 탄 그 누구도 짜증을 내지 않습니다. 한국남자들이 참 많이 변했습니다.
그 법석을 떨면서 펜션에 도착했습니다. 나는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던 부산친구 부부와 합류하면서 고향친구들과는 작별했어요. 부산친구가 나를 위해 선별해 놓은 바닷가의 근사한 한정식집에서 저녁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광열이가 ‘미국친구’를 열댓명이 같이 뒹굴어야하는 펜션에서 재울 수 없다면서 특별히 예약해 놓은 호텔로 가기로 했습니다. 하루 숙박에 천 불 가까이 하는 ‘파이브 스타급’ 호텔이랍니다.
오랜만에 만난 부산친구와 수다를 떨면서 호텔로 이동하는 중에 또 놀랄 일이 생겼습니다. 부산친구한테 미연이가 전화를 했어요. 자기도 ‘파이브 스타 호텔’에 한 번 자봐야겠으니 돌아와서 자기를 태우고 가랍니다. 엄마야! 차를 출발시킨 지가 벌써 삼십여분, 호텔이 지측에 있습니다. 2,3 분이면 도착할 거리에. 그런데 다시 돌아가라고?! 내가 옆에서 난리를 쳤습니다. 우리랑 합류하려면 진즉 하든지 이제 다 도착했는데 다 늦게 뭐하는 거냐고?! 오려면 택시 타고 오라고! 그런데요. 운전하던 부산친구 남편이 나를 손짓으로 만류합니다. 괜찮다고. 다시 돌아가면 된다고. 그러면서 급히 차를 돌립니다. 우리는 다시 삼십여분을 돌아가서 미연이를 태우고 왔습니다. 나는 감탄했습니다. 한국남자들의 배려심이 참 대단하구나! 정말로 모두들 자상하고 순하고 착하구나!
부산에 도착한 날 밤 한 번, 그리고 다음 날 오전에 한 번, 두 번의 식사자리에서도 ‘한국남자’의 세심함과 자상함을 보았습니다. 부산친구와 나는 그냥 손놓고 먹기만 하고요. 부산친구 남편이 연신 찌개를 떠 주고 물을 따라주고 먹기 좋게 반찬을 밀어 줍니다. 나는 너무 신기해서 부산친구 남편의 얼굴을 한참이나 쳐다보았습니다. 한국남자들은 여전히 제왕행세를 하는 줄 알았거든요. 여성에 대한 배려와 양보와 대접을 전혀 할 줄 모르는. 왜냐면 30여년 전, 내가 한국을 떠나올 땐 그랬으니까. 가만히 앉아서 고개짓으로 물, 담배, 재떨이 심부름을 시키는. 다방에 커피를 마시러 가도 여성이 먼저 남자 잔에 설탕과 크림을 타서 건네 주는 걸 당연시 하는.
외국에 사는 교포들은 한국을 떠난 그 시절에 사고가 머물러 있다는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고보니 내가 그랬네요. 한국에 사는 사람들의 의식구조는 하루가 바쁘게 급변하는데 나 혼자 먼 옛날, 내가 한국을 떠날 때의 그 순간에 머물러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한국남자들은 봉건적이고 고지식하고 무례하고 권위적이고 보수적이라는 생각에요.
늘 그랬듯이 내가 출국하기 전에 머무는 서울의 한 호텔로 무당친구가 왔습니다. 무당친구는 만사 대충대충, 허술하기 짝이 없는 나를 대신해 늘 꼼꼼하게 내 가방을 싸줍니다. 그런데요. 이번에는 무당친구가 방에 들어서자 마자 들고 온 베낭에서 뭘 주섬주섬 꺼냅니다. 울긋불긋 온갖 색들이 어우러진 큰 천같은 건데요. 내가 말릴 새도 없이 그 천을 내 머리위에 확 덮고는 뭐라고 중얼중얼 주문같은 걸 외웁니다. 그리고는 그 천을 한 줄씩 쫙쫙 찢어요. 내가 몸이 안 좋다니까 무당친구가 특별히 해 준 ‘의식’이랍니다. 미국들어갈 동안 아무 문제없도록, 그리고 도착해서 하루빨리 기력 회복하기를 기원해주는. 나야 물론 그런 걸 안 믿지요. 그렇지만 마음 써준 친구의 마음이 고마왔습니다.
길게 찢어놓은 천을 보는데 순간 머릿속에 반짝, 전깃불이 켜진 것처럼 기발한 아이디어 하나가 떠오릅니다. 나는 울긋불긋한 그 천을 내 가방 두 개의 손잡이에 묶었어요. 컨테이너에서 마구 돌아가가는 고만고만한 수백개의 시커먼 가방들 속에 내 가방을 찾는 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라서요. 아니나 다를까,울긋불긋 요란한 색의 천이 묶인 내 가방은 금방 눈에 뜨였습니다. 어렵지않게 가방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무당친구의 의식덕분인지 무사히 집에 잘 도착했고 몸은 조금씩 잘 회복되고 있습니다.
이계숙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