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노벨문학상 수상…평화헌법 개헌 등 반대한 사회참여 지식인
황석영 소설 평가, 김지하 투옥 때 단식 투쟁하기도
전후 일본 문학을 대표하는 문인이자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오에 겐자부로(大江建三郞)가 3일 노환으로 별세했다고 교도통신이 13일 보도했다. 향년 88세.
고인은 ‘개인적인 체험’, ‘만연원년의 풋볼’로 1994년 노벨문학상을 탔다. ‘설국’으로 1968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가와바타 야스나리에 이어 일본인으로는 두 번째 수상이었다.
1935년 에히메현 산골 마을에서 태어난 작가는 도쿄대 불문학과 재학 중인 1958년 단편소설 ‘사육’으로 당시 최연소인 23세에 일본 최고 문학상인 아쿠타가와상을 받으며 문단에 화려하게 등장했다.
고인은 일본 사회의 불안한 상황과 정치적 문제에 대한 비판, 천황제와 군국주의, 평화와 공존, 지적 장애를 가진 장남과의 공생, 고향 시코쿠 숲 마을의 역사와 전통 등을 주제로 수많은 글을 발표했고, 국내외 여러 사회 문제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오에는 과거 자기 작품을 3개 시기로 나눠 설명했다. 1기는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봤던 일본의 모습으로 사회적 담론을 반영하는 소설을 주로 썼다. 이어 2기는 장남 히카리가 청력, 시력, 사고력 없는 장애인으로 태어나면서 아이와 부모의 성장 과정을 담은 사소설을 주로 썼다. 그는 자신의 아이가 눈이 보였으면 좋겠다는 희망으로 아이 이름을 히카리(빛)로 지었다고 말했다.
마지막 3기는 30대 후반 이후로 사소설적인 경향을 담으면서도 일본 사회에 대한 비판을 포괄하는 객관적인 소설을 쓴 시기였다.
고인은 작품뿐 아니라 사회 문제에 참여하는 지식인으로서도 존경받았다. 2004년 군대 보유 금지와 전쟁과 무력행사를 영구 포기하는 내용이 담긴 헌법 9조 등 평화헌법 개정에 반대하기 위해 다른 석학들과 ‘9조의 모임’을 결정해 개헌에 반대했다.
또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 후 일본 정부의 원전 재가동 정책에 반대하는 집회에 참석해 자신의 인생 최종 과업은 핵 없는 세계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라며 “원전 문제를 젊은 세대에 떠넘겨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과거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비판하기도 했다.
고인은 한국을 여러 차례 방문했으며 한일 역사 문제에 대해서도 자신의 소신을 뚜렷이 밝혔다. 그는 2차 아베 신조 정권 때인 2015년 3월 연세대에서 열린 ‘연세-김대중 세계미래포럼’에 참가해 “일본은 아무리 사죄해도 충분하지 않을 만큼 막대한 범죄를 한국에 저질렀다. 그런데 아직도 한국인들에게 일본은 충분히 사죄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오에는 또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여성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한 일본의 후진성을 인정해야 한다”며 “일본 정부나 국민이 충분히 사죄했다고 보기 어렵다. 일본 국가가 사죄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는 한국 소설에 대해서는 “현대소설을 애독하고 높이 평가한다”며 “그중에서 황석영은 현대의 중요한 문제를 지적하는 큰 소설을 쓴다. 개인의 내면을 그리면서도 사회로 이어지는 인간을 묘사한다”고 높이 평가했다. 1970년대 김지하 시인이 투옥됐을 때는 단식투쟁까지 하며 항의했다.
고인은 ‘개인적인 체험’, ‘만연원년의 풋볼’로 1994년 노벨문학상을 탔다. ‘설국’으로 1968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가와바타 야스나리에 이어 일본인으로는 두 번째 수상이었다.
1935년 에히메현 산골 마을에서 태어난 작가는 도쿄대 불문학과 재학 중인 1958년 단편소설 ‘사육’으로 당시 최연소인 23세에 일본 최고 문학상인 아쿠타가와상을 받으며 문단에 화려하게 등장했다.
고인은 일본 사회의 불안한 상황과 정치적 문제에 대한 비판, 천황제와 군국주의, 평화와 공존, 지적 장애를 가진 장남과의 공생, 고향 시코쿠 숲 마을의 역사와 전통 등을 주제로 수많은 글을 발표했고, 국내외 여러 사회 문제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오에는 과거 자기 작품을 3개 시기로 나눠 설명했다. 1기는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봤던 일본의 모습으로 사회적 담론을 반영하는 소설을 주로 썼다. 이어 2기는 장남 히카리가 청력, 시력, 사고력 없는 장애인으로 태어나면서 아이와 부모의 성장 과정을 담은 사소설을 주로 썼다. 그는 자신의 아이가 눈이 보였으면 좋겠다는 희망으로 아이 이름을 히카리(빛)로 지었다고 말했다.
마지막 3기는 30대 후반 이후로 사소설적인 경향을 담으면서도 일본 사회에 대한 비판을 포괄하는 객관적인 소설을 쓴 시기였다.
고인은 작품뿐 아니라 사회 문제에 참여하는 지식인으로서도 존경받았다. 2004년 군대 보유 금지와 전쟁과 무력행사를 영구 포기하는 내용이 담긴 헌법 9조 등 평화헌법 개정에 반대하기 위해 다른 석학들과 ‘9조의 모임’을 결정해 개헌에 반대했다.
또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 후 일본 정부의 원전 재가동 정책에 반대하는 집회에 참석해 자신의 인생 최종 과업은 핵 없는 세계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라며 “원전 문제를 젊은 세대에 떠넘겨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과거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비판하기도 했다.
고인은 한국을 여러 차례 방문했으며 한일 역사 문제에 대해서도 자신의 소신을 뚜렷이 밝혔다. 그는 2차 아베 신조 정권 때인 2015년 3월 연세대에서 열린 ‘연세-김대중 세계미래포럼’에 참가해 “일본은 아무리 사죄해도 충분하지 않을 만큼 막대한 범죄를 한국에 저질렀다. 그런데 아직도 한국인들에게 일본은 충분히 사죄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오에는 또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여성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한 일본의 후진성을 인정해야 한다”며 “일본 정부나 국민이 충분히 사죄했다고 보기 어렵다. 일본 국가가 사죄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는 한국 소설에 대해서는 “현대소설을 애독하고 높이 평가한다”며 “그중에서 황석영은 현대의 중요한 문제를 지적하는 큰 소설을 쓴다. 개인의 내면을 그리면서도 사회로 이어지는 인간을 묘사한다”고 높이 평가했다. 1970년대 김지하 시인이 투옥됐을 때는 단식투쟁까지 하며 항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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