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포르투갈에서 일어난 민주화 혁명에 ‘카네이션 혁명’이라는 이름이 붙게 만든 일명 ‘카네이션 여인’ 셀레스트 카에이루가 지난 15일 9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고 일간 뉴욕타임스(NYT)가 17일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카에이루의 손녀 캐롤리나 카에이루 폰텔라는 포르투갈 국영 루사 통신에 할머니가 병원에서 사망했다고 밝혔다.
카에이루는 1974년 4월 25일 포르투갈에서 독재 정권에 반발해 일어난 민주화 혁명인 ‘4·25 혁명’, 또는 ‘카네이션 혁명’ 당시 리스본 시내의 한 식당에서 일하며 홀로 딸을 키우던 평범한 ‘싱글맘’이었다. 혁명 당일 카에이루가 일하던 식당 주인은 개업 1주년을 맞아 식당을 장식하기 위해 카네이션을 대량으로 주문해 둔 상태였다.
그러나 그날 새벽부터 리스본 시내에는 독재 정권에 반발한 청년 장교들과 좌파 세력들이 혁명을 일으킬 것이라는 소식이 돌았고, 이를 들은 식당 주인은 출근한 카에이루에게 그날 식당 문을 닫고 카네이션들을 집에 가져다 두라고 말했다. 카네이션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던 카에이루는 혁명의 주축이 된 청년군이 탄 장갑차 행렬이 거리를 지나는 것을 보았다.
당시 포르투갈에서는 1960년대까지 30년 넘게 집권한 독재자 안토니우 데 올리베이라 살라자르와, 그의 뒤를 이은 마르셀루 카에타누 총리 정권을 향한 불만이 극에 달해 있었다. 특히 카에타누 정권이 아프리카에 식민지를 계속 유지하겠다며 젊은 청년들을 희생시켜 가며 현지 독립군과 전쟁을 이어가는 것에 대한 불만이 높았다.
이에 리스본 시민들은 정권을 무너뜨리겠다며 거리로 나선 청년 장교들과 좌파 세력들을 향해 국기를 흔들며 지지를 보냈다. 당시 이런 열띤 군중 속에 섞여 있던 카에이루에게 한 젊은 군인이 다가와 담배를 청했고, 카에이루는 담배를 피지 않는다고 답하며 대신 갖고 있던 카네이션 한 송이를 건넸다.
카네이션을 받은 이 군인은 웃으며 꽃을 총구에 꽂았고, 이를 본 다른 군인들도 카에이루에게 카네이션을 달라며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후 구경꾼들의 환호 속에서 수많은 혁명군의 소총구와 장갑차의 대포 총구에 붉은 꽃이 피어났고, 이 카네이션은 이날 혁명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혁명 며칠 뒤인 5월 1일 노동절에 혁명군이 퍼레이드에 나섰을 때도 시민들은 이들에게 카네이션을 달아주며 지지를 보냈다. 이날 혁명의 결과로 포르투갈에서는 살라자르부터 이어져 온 제2공화국 정부가 무너졌으며 포르투갈 역사상 최초의 자유 선거로 선출된 민주 정권이 들어서게 됐다.
아프리카의 포르투갈령 식민지들의 독립도 본격적으로 이뤄졌다. 이 혁명은 거리에 있던 위장 경찰의 총에 맞아 숨진 민간인 네 명을 제외하고는 거의 사상자가 발생하지 않아 대표적인 무혈 혁명 사례로도 꼽힌다.
한편 ‘카네이션 혁명’의 이름을 붙인 카에이루는 이후 국민들 사이에서 ‘카네이션 여인’으로 불리며 도시 전설과 같은 존재로 남았으나, 그 자신은 정작 가난 속에서 홀로 딸을 키우며 근근이 살아온 것으로 전해졌다.
말년에는 리스본 북부에서 국민연금을 받으며 딸과 손녀와 함께 지냈으며, 올해 4월 25일 열린 혁명 50주년 기념식에 참석해 시민들의 환호를 받기도 했다. 포르투갈군은 16일 발표한 성명에서 카에이루의 ‘소박한 행동’이 “포르투갈을 영원히 변화시킨 운동의 상징”이 됐다면서 그를 추모했다.
카에이루는 1974년 4월 25일 포르투갈에서 독재 정권에 반발해 일어난 민주화 혁명인 ‘4·25 혁명’, 또는 ‘카네이션 혁명’ 당시 리스본 시내의 한 식당에서 일하며 홀로 딸을 키우던 평범한 ‘싱글맘’이었다. 혁명 당일 카에이루가 일하던 식당 주인은 개업 1주년을 맞아 식당을 장식하기 위해 카네이션을 대량으로 주문해 둔 상태였다.
그러나 그날 새벽부터 리스본 시내에는 독재 정권에 반발한 청년 장교들과 좌파 세력들이 혁명을 일으킬 것이라는 소식이 돌았고, 이를 들은 식당 주인은 출근한 카에이루에게 그날 식당 문을 닫고 카네이션들을 집에 가져다 두라고 말했다. 카네이션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던 카에이루는 혁명의 주축이 된 청년군이 탄 장갑차 행렬이 거리를 지나는 것을 보았다.
당시 포르투갈에서는 1960년대까지 30년 넘게 집권한 독재자 안토니우 데 올리베이라 살라자르와, 그의 뒤를 이은 마르셀루 카에타누 총리 정권을 향한 불만이 극에 달해 있었다. 특히 카에타누 정권이 아프리카에 식민지를 계속 유지하겠다며 젊은 청년들을 희생시켜 가며 현지 독립군과 전쟁을 이어가는 것에 대한 불만이 높았다.
이에 리스본 시민들은 정권을 무너뜨리겠다며 거리로 나선 청년 장교들과 좌파 세력들을 향해 국기를 흔들며 지지를 보냈다. 당시 이런 열띤 군중 속에 섞여 있던 카에이루에게 한 젊은 군인이 다가와 담배를 청했고, 카에이루는 담배를 피지 않는다고 답하며 대신 갖고 있던 카네이션 한 송이를 건넸다.
카네이션을 받은 이 군인은 웃으며 꽃을 총구에 꽂았고, 이를 본 다른 군인들도 카에이루에게 카네이션을 달라며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후 구경꾼들의 환호 속에서 수많은 혁명군의 소총구와 장갑차의 대포 총구에 붉은 꽃이 피어났고, 이 카네이션은 이날 혁명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혁명 며칠 뒤인 5월 1일 노동절에 혁명군이 퍼레이드에 나섰을 때도 시민들은 이들에게 카네이션을 달아주며 지지를 보냈다. 이날 혁명의 결과로 포르투갈에서는 살라자르부터 이어져 온 제2공화국 정부가 무너졌으며 포르투갈 역사상 최초의 자유 선거로 선출된 민주 정권이 들어서게 됐다.
아프리카의 포르투갈령 식민지들의 독립도 본격적으로 이뤄졌다. 이 혁명은 거리에 있던 위장 경찰의 총에 맞아 숨진 민간인 네 명을 제외하고는 거의 사상자가 발생하지 않아 대표적인 무혈 혁명 사례로도 꼽힌다.
한편 ‘카네이션 혁명’의 이름을 붙인 카에이루는 이후 국민들 사이에서 ‘카네이션 여인’으로 불리며 도시 전설과 같은 존재로 남았으나, 그 자신은 정작 가난 속에서 홀로 딸을 키우며 근근이 살아온 것으로 전해졌다.
말년에는 리스본 북부에서 국민연금을 받으며 딸과 손녀와 함께 지냈으며, 올해 4월 25일 열린 혁명 50주년 기념식에 참석해 시민들의 환호를 받기도 했다. 포르투갈군은 16일 발표한 성명에서 카에이루의 ‘소박한 행동’이 “포르투갈을 영원히 변화시킨 운동의 상징”이 됐다면서 그를 추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