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훈부, 우운 문양목 선생이어 두 선생의 유해 봉환 추진 계획 밝혀
일제강점기 샌프란시스코에서 활동했던 독립유공자 차보석・신달윤 선생의 유해 봉환이 추진된다. 최근 국가보훈부는 차보석, 신달윤 선생의 유해가 콜마의 사이프러스 묘지에 안장된 것을 확인했다고 발표한 뒤 이를 한국으로 봉환하기 위해 절차를 진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국가보훈부는 지난 10월 유해 봉환이 추진되고 있는 우운 문양목 애국지사의 묘소를 확인하기 위해 북가주를 방문해 조사를 펼치는 과정에서 차보석, 신달윤 선생의 유해가 사이프러스 묘지에 안장되어 있는 것을 확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문양목 애국지사의 묘소와 함께 유해 봉환이 추진되고 있는 차보석 선생은 1892년 평안남도 출생으로 1921년 중국 상해에서 재상해유일학생회 회원으로 활동하다 1925년 미국으로 건너와 대한여자애국단 총단장 및 샌프란시스코지부 단장, 대한인국민회 회원, 샌프란시스코 국어학교 교사 등으로 활동하며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했다.
1926년 3월 대한여자애국단 총단 위원 선거에서 총단 위원 겸 총단장에 선출됐으며, 1927~1928년에도 총단장으로 활동했다. 1929년 3월 대한여자애국단 총단 서기, 7월 샌프란시스코와 오클랜드 재류 부인들이 조직한 대한인여자저금회 재무로 선출되기도 했다.
1930년 3월 애국단 총단 재무, 1931년 1월에는 샌프란시스코 국어학교 재무를 맡았다. 1931년 2월 대한인국민회에 가입했고, 3월 애국단 총단 재무로 재선됐으며, 1932년 2월 국민회 3ㆍ1절 기념식 준비위원으로 활동하는 등 1925년부터 1932년까지 여러 차례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국가보훈부 공훈전자사료관 자료 참조).
차보석 선생과 함께 유해 봉환이 추진되고 있는 신달윤 선생은 1881년 평안남도에서 출생해 1907년 공립협회 리버사이드지방회 구제위원, 1908년 샌프란시스코지방회 회원, 1910년 대한인국민회 새크라멘토지방회 부회장, 1913년 11월 대의원, 1914년도 총무, 1916년도 재무로 활동했다. 1918년 9월에는 신한민보 식자기계채 청장 제19회 동맹자가 되었으며, 1919년에는 맨티카지방회로 옮겨 총무로 활동하기도 했다.
1925년 스탁톤에서 지방회를 조직했고, 1928년 샌프란시스코지방회 총무, 1931년 법무로 활동했으며, 1943년 6월에는 샌프란시스코에서 결성된 한인경위대 대원으로 활약했다. 신달윤 선생은 1905년부터 1945년까지 여러 차례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기도 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지난 201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국가보훈부 공훈전자사료관 자료 참조).
국가보훈부는 사이프러스 묘지에서 두 독립유공자의 묘소가 확인됨에 따라 향후 유족 등 직계후손을 찾아 한국으로 유해 봉환 여부를 협의해 나갈 계획이다. 보훈부에 따르면 유해 봉환의 경우 유족의 청원으로 진행이 되지만 생존 유족이 없을 경우 한인사회의 청원으로 봉환을 추진할 수도 있다고 전했다.
국가보훈부는 지난 10월 유해 봉환이 추진되고 있는 우운 문양목 애국지사의 묘소를 확인하기 위해 북가주를 방문해 조사를 펼치는 과정에서 차보석, 신달윤 선생의 유해가 사이프러스 묘지에 안장되어 있는 것을 확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문양목 애국지사의 묘소와 함께 유해 봉환이 추진되고 있는 차보석 선생은 1892년 평안남도 출생으로 1921년 중국 상해에서 재상해유일학생회 회원으로 활동하다 1925년 미국으로 건너와 대한여자애국단 총단장 및 샌프란시스코지부 단장, 대한인국민회 회원, 샌프란시스코 국어학교 교사 등으로 활동하며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했다.
1926년 3월 대한여자애국단 총단 위원 선거에서 총단 위원 겸 총단장에 선출됐으며, 1927~1928년에도 총단장으로 활동했다. 1929년 3월 대한여자애국단 총단 서기, 7월 샌프란시스코와 오클랜드 재류 부인들이 조직한 대한인여자저금회 재무로 선출되기도 했다.
1930년 3월 애국단 총단 재무, 1931년 1월에는 샌프란시스코 국어학교 재무를 맡았다. 1931년 2월 대한인국민회에 가입했고, 3월 애국단 총단 재무로 재선됐으며, 1932년 2월 국민회 3ㆍ1절 기념식 준비위원으로 활동하는 등 1925년부터 1932년까지 여러 차례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국가보훈부 공훈전자사료관 자료 참조).
차보석 선생과 함께 유해 봉환이 추진되고 있는 신달윤 선생은 1881년 평안남도에서 출생해 1907년 공립협회 리버사이드지방회 구제위원, 1908년 샌프란시스코지방회 회원, 1910년 대한인국민회 새크라멘토지방회 부회장, 1913년 11월 대의원, 1914년도 총무, 1916년도 재무로 활동했다. 1918년 9월에는 신한민보 식자기계채 청장 제19회 동맹자가 되었으며, 1919년에는 맨티카지방회로 옮겨 총무로 활동하기도 했다.
1925년 스탁톤에서 지방회를 조직했고, 1928년 샌프란시스코지방회 총무, 1931년 법무로 활동했으며, 1943년 6월에는 샌프란시스코에서 결성된 한인경위대 대원으로 활약했다. 신달윤 선생은 1905년부터 1945년까지 여러 차례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기도 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지난 201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국가보훈부 공훈전자사료관 자료 참조).
국가보훈부는 사이프러스 묘지에서 두 독립유공자의 묘소가 확인됨에 따라 향후 유족 등 직계후손을 찾아 한국으로 유해 봉환 여부를 협의해 나갈 계획이다. 보훈부에 따르면 유해 봉환의 경우 유족의 청원으로 진행이 되지만 생존 유족이 없을 경우 한인사회의 청원으로 봉환을 추진할 수도 있다고 전했다.
한편, 국가보훈부는 올해 초부터 유해 봉환을 문양목 선생의 경우 법률상의 문제가 발생해 북가주 지역에서 활동하는 최홍일 변호사를 선임해 봉환을 추진하고 있다. 캘리포니아에서는 공동묘지에 매장된 유해의 경우 부모나 배우자, 형제자매 또는 자녀의 신청이 있을 경우 이장이 가능하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문양목 선생의 경우 아들이 지난 2020년 8월 타계해 유해 이장을 요청할 친인척이 없는 상황이다.
보훈부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변호사를 선임하는 것은 물론 유해 이장을 위해 북가주 지역 한인들의 서명을 받아 파묘 청원 소송을 진행한다는 계획이다.
우운 문양목 선생은 1869년 충남 서산 출신으로 1903년 경기도 인천에서 서당교사로 활동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하던 중 일제의 한국침탈이 노골화되어 가자, 국권회복운동에 투신할 목적으로 1905년 하와이 사탕농장 노동자 모집에 응모하여 하와이로 망명했다.
이후 1906년 샌프란시스코로 건너와 1907년 3월 장경·백일규 등과 함께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대동보국회를 결성하고 1907년 10월 중앙회장에 선임됨과 동시에 동회 기관지인 대동공보사 사장 겸 발행인을 겸직하면서 국내외 동포들을 대상으로 국권회복의식을 고취시켰다.
1908년 3월 대한제국 외교고문인 스티븐스가 샌프란시스코에 와서 일제의 한국침략을 정당화하는 발언과 글을 신문지상을 통해 발표하자, 대동보국회에서는 미주 한인 민족운동단체인 공립협회와 합동으로 공동회를 개최해 스티븐스의 망언에 대한 대책을 강구했으며, 스티븐스에게 항의 방문을 하는 4인에 선정돼 스티븐스를 만나 그의 발언을 정정 취소할 것을 요구했다. 당시 스티븐스가 요구를 거절하자 그를 구타하고 돌아와 그에 대한 대책을 논의했다.
그 이튿날 전명운·장인환 의사가 스티븐스를 처단하자, 양 의사의 재판후원회를 결성하고 판사전권위원으로 임명되어 양 의사의 재판 후원 및 후원경비 조달, 변호사 교섭 등을 담당하면서 공판과정을 ‘독립재판’으로 규정하는 등 재판과정을 통해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구미 각국에 널리 인식시켰다.
이후 1908년 7월 콜로라도주 덴버에서 박용만이 한인군사학교의 설립과 재미한인단체의 통합 논의를 목적으로 개최한 애국동지대표회를 적극 후원했으며, 1909년경 박용만이 네브라스카주에 한인소년병학교를 설립하자 학생들을 권유·입교시키는 등 사관 양성을 통한 항일무장투쟁론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1910년 로스앤젤레스에서 대동신서관이란 출판사를 설립하고 같은 해 2월 이승만의 『독립정신』을 출판하여 독립정신을 고취시키는데 힘을 기울인 그는 동년 2월 10일 대동보국회가 대한인국민회에 흡수 통합되자 대한인국민회의 총무로 당선되었고, 이듬해인 1911년 2월 북미 대한인국민회 총회장에 당선되어 일제의 한국 강점에 대항하기 위해 군인양성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한편, 독립군 기지 개척과 해외 한인의 통합기관을 조직하기 위해 시베리아와 만주지역에 지방총회를 설립하기도 했다.
그 후 계속 대한인국민회의 중견 간부로 활동하던 중 1940년 서거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국가보훈부 공훈전자사료관 자료 참조).
보훈부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변호사를 선임하는 것은 물론 유해 이장을 위해 북가주 지역 한인들의 서명을 받아 파묘 청원 소송을 진행한다는 계획이다.
우운 문양목 선생은 1869년 충남 서산 출신으로 1903년 경기도 인천에서 서당교사로 활동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하던 중 일제의 한국침탈이 노골화되어 가자, 국권회복운동에 투신할 목적으로 1905년 하와이 사탕농장 노동자 모집에 응모하여 하와이로 망명했다.
이후 1906년 샌프란시스코로 건너와 1907년 3월 장경·백일규 등과 함께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대동보국회를 결성하고 1907년 10월 중앙회장에 선임됨과 동시에 동회 기관지인 대동공보사 사장 겸 발행인을 겸직하면서 국내외 동포들을 대상으로 국권회복의식을 고취시켰다.
1908년 3월 대한제국 외교고문인 스티븐스가 샌프란시스코에 와서 일제의 한국침략을 정당화하는 발언과 글을 신문지상을 통해 발표하자, 대동보국회에서는 미주 한인 민족운동단체인 공립협회와 합동으로 공동회를 개최해 스티븐스의 망언에 대한 대책을 강구했으며, 스티븐스에게 항의 방문을 하는 4인에 선정돼 스티븐스를 만나 그의 발언을 정정 취소할 것을 요구했다. 당시 스티븐스가 요구를 거절하자 그를 구타하고 돌아와 그에 대한 대책을 논의했다.
그 이튿날 전명운·장인환 의사가 스티븐스를 처단하자, 양 의사의 재판후원회를 결성하고 판사전권위원으로 임명되어 양 의사의 재판 후원 및 후원경비 조달, 변호사 교섭 등을 담당하면서 공판과정을 ‘독립재판’으로 규정하는 등 재판과정을 통해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구미 각국에 널리 인식시켰다.
이후 1908년 7월 콜로라도주 덴버에서 박용만이 한인군사학교의 설립과 재미한인단체의 통합 논의를 목적으로 개최한 애국동지대표회를 적극 후원했으며, 1909년경 박용만이 네브라스카주에 한인소년병학교를 설립하자 학생들을 권유·입교시키는 등 사관 양성을 통한 항일무장투쟁론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1910년 로스앤젤레스에서 대동신서관이란 출판사를 설립하고 같은 해 2월 이승만의 『독립정신』을 출판하여 독립정신을 고취시키는데 힘을 기울인 그는 동년 2월 10일 대동보국회가 대한인국민회에 흡수 통합되자 대한인국민회의 총무로 당선되었고, 이듬해인 1911년 2월 북미 대한인국민회 총회장에 당선되어 일제의 한국 강점에 대항하기 위해 군인양성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한편, 독립군 기지 개척과 해외 한인의 통합기관을 조직하기 위해 시베리아와 만주지역에 지방총회를 설립하기도 했다.
그 후 계속 대한인국민회의 중견 간부로 활동하던 중 1940년 서거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국가보훈부 공훈전자사료관 자료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