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숙 작가의 살아가는 이야기] 구내식당 반찬이 잘 나온 것과 같은

사진은 영선이가 남편으로 부터 생일선물로 받은 톰 브라운 가디건.
‘시집가는 날 등창 난다‘는 속담이 나한테 만큼 반드시 적용되는 사람이 또 있을까요. ‘머피의 법칙’과 비슷한 이 상황은 예나 지금이나 일부러 계획한 듯이 내게 딱딱 잘 들어맞습니다. 중요한 자리에 참석할 일이 있는데 얼굴에 주먹만 한 뾰루지가 난다든지. 누가 맛있는 저녁을 산다고 했는데 갑자기 감기가 걸려 입맛이 떨어진다든지 이가 아파서 씹지를 못한다든지 하는.

이번에도 예외는 없었습니다. 동생가족이 와있었는데 그동안 아무 문제 없이 멀쩡하던 물탱크가 고장난 것입니다. 물이 마구 새기 시작한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도 아시지요. 미국은 일처리가 거북이보다 더 늦다는 것을. 여기저기 기술자를 수배해 봤지만 빠르면 일주일, 늦으면 보름이 지나서야 올 수 있대요. 손가락에 쥐가 나도록 전화를 돌려서 다행히 사흘 후에 가능하다는 기술자를 만나긴 했지만 그 사흘동안은 지옥이었습니다. 샤워는 물론 못했고 받아놓은 물을 데워서 양치와 세수만 겨우. 식구가 늘어 설거지할 그릇은 씽크대에 산더미같이 쌓이고(칭찬해 주세요. 그런 상황에서도 일회용 그릇은 안 썼습니다)산책한 강아지 발을 씻겨야하는데 물이 없으니 어째요. 와입으로 닦였습니다. 그 난리를 친 끝에 마침내 물이 나오던 날 우리는 만세를 불렀습니다. 앞 다투어 샤워실로 향했지요. 떨어지는 물 밑에 몸을 마냥 맡기면서 (내가 물을 엄청 아끼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뜨거운 물에 샤워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2년 가까이 일본에 혼자 살면서 숙식을 해결한 동생. 일본 물가가 어마어마하게 비싸지요. 매달 받는 2백만원 남짓한 장학금으로는 방세 내기에도 빠듯해서 최소한 생존에 필요한 음식만 해먹고 살았다고 합니다. ‘스시 천국’인 일본에서 제대로 된 스시 한 번을 먹지 못했다고 합니다. 나 역시 식생활이 그리 알찬 편은 아니지만 동생이 와 있는 동안은 있는 솜씨 없는 솜씨를 부렸습니다. 또한 주위 사람들이 동생 주라고 이것저것해서 갖다 주었어요. 저녁식탁이 매일매일 현란합니다. 돈가스, 갈비찜, 연어구이, 잡채, 스시, 김치찌개… 꽃밭처럼 화려하고 푸짐한 갖가지 음식들이 차려진 식탁에 앉을 때마다 나이 쉰의 동생은 좋아 죽으려고 합니다. 함박웃음은 물론 어린아이처럼 환호성까지 올려요. 그리고 식사가 다 끝날 때까지 음식에 대한 감탄과 찬사를 계속합니다. 와아, 이 갈비찜은 여지껏 먹어본 중 최고다! 이 돈까스는 일본에서도 먹어 볼 수 없는 최상의 맛이네! 이 연어는 씹을 틈도 없이 입에서 살살 녹네그려! 그리 특별할 것도 없는 음식 하나에 너무나 행복해하는 동생.

한 할배가 수술한 후 집에서 요양하고 있다길래 문병을 갔습니다. 나 혼자라면 안 갑니다. 내가 간다고 해서 할배가 금방 나아서 벌떡 일어날 것도 아닌데 수선 피우는 게 싫어요. 흐트러져있는 환자 모습도 보기 싫고요. 그런데 내가 가장 존경하는 할배가 같이 가보자길래 어쩔 수 없었습니다. 예상대로 할배는 봉두난발한 채 자리보전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위로가 서툰 사람입니다. 앞으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두 할배가 부여안고 덕담을 나누는 모습을 보면서 딴청을 피웠습니다. 환자가 있는 방이라 그런지 쿰쿰한 냄새가 나서 눈쌀을 찌푸리면서. 괜히 왔다고 속으로 후회를 했습니다. 나중에 들었습니다. 할배가 너무너무 좋아했다는 것을. 문병 잘 안 다니는 이계숙이가 다녀갔다고 만나는 사람마다 자랑을 했다는 겁니다. 그 얘기를 전해듣고 생각했습니다. 가끔은 아픈 사람도 찾아봐야 하는구나. 아픈 사람한테는 그게 아주 고마운 일이구나….

한국의 친구 영선이. 매해 남편으로부터 생일 선물을 받는다고 언제 한번 썼습니다. 올해는 명품가디건을 받았답니다. 예쁜 꽃과 초가 장식된 케잌과 함께. 생일을 전후해서 외출했다 돌아오니 언니가 또 생일을 축하하는 꽃바구니를 보냈다는군요. 문 앞에 놓인 꽃바구니를 보고 깜짝 놀랐다는 영선이. 동생을 생각하는 언니의 따뜻한 마음에 감격했다는 영선이.

생일, 결혼기념일, 크리스마스 등 기념일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치 않는 우리 부부였습니다. 그동안 생일이라고, 결혼 기념일이라고 외식을 하거나 선물을 주고 받은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선물은 커녕 서로 축하한다는 말도 하지 않았어요. 평생에 한 번 오는 날도 아닌, 매해 오는 날을 뭐 그리 특별하게 법석을 떨어야하는가에 우리 둘다 의기투합했던 까닭입니다. 그런데요. 가장 사사로운 것이 가장 특별한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몰랐던 것 같습니다. 삶의 재미와 의미란 다른 데 있는 게 아니었어요. 소소하고 작고 지극히 평범한 것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외과의사인 이국종 교수가 최근에 했다는 말을 접하고 든 생각이었습니다.

이국종 교수가 말했답니다. “남의 인생은 성공한 것처럼 보이고, 행복하며 멋져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인생은 아무리 화려해 보여도 결국 우울한 종말이 찾아온다. 구내식당 점심 반찬이 잘 나온 것과 같은 사소한 일에라도 행복을 느끼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다.“ 그렇습니다. 고급차를 사고 사업을 늘리고 크고 넓은 집을 사고 자식을 유명대학에 보내는 일 역시 우리 인생에 중요한 일임에 틀림없지만요. 뜨거운 물에 샤워를 하는 일, 가족들과 둘러 앉아 맛있는 음식을 먹는 일, 생일을 서로 챙겨주면서 마음을 표현하는 일, 마음맞는 지인과 전화로 수다를 떠는 일, 위로가 필요한 사람을 들여다보는 일 등이 바로 사는 행복이요, 사는 재미요, 귀한 일이었습니다. 그동안 나는 얼마나 각박하고 메마르게 살았던 것일까요.

이계숙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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