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숙 작가의 살아가는 이야기] 나이 들면 왜 빨강색이 좋아질까

고향친구 미연이. 무당친구가 미연이를 처음 봤을 때 대뜸 말하더군요. 평범한 팔자가 아니라고. 만인의 눈길과 조명을 받는 팔자라고. 무당친구 말대로 미연이는 영화배우나 가수로 나갔어야 했나 봅니다. 뛰어나게 노래를 잘하는 것은 물론 눈에 확 뜨이게 예쁘거든요. 어느 곳에서나 군계일학입니다. 게다가 항상 차림새가 다른 사람보다 유독 화려하고 특별합니다. 손금 잘 보는 우리 고모처럼 귀걸이 목걸이 반지 팔찌 등을 엄청 끼고 답니다. 어떤 땐 손가락마다 다 반지를 끼고요. 옷도 선명한 원색만, 그러니까 진홍색, 빨간색, 초록색,노랑색 등 보통사람들이 감히 엄두도 못 낼 색깔들을 과감하게 소화해 냅니다. 허벅지부터 발목까지 쭈욱 따라서 구멍이 숭숭 뚫린 바지도 스스럼없이 입어냅니다. 미연이가 특히 좋아하는 의상은 스팽클 위주로 된, 그러니까 반짝반짝 반짝이가 장착된, 햇빛 아래 보면 눈이 막 부시는, 내가 입어놓으면 광대같을 스타일입니다. 재미있게도 미연이는 평범한 의상보다 그렇게 튀게 입는 게 또 아주 잘 어울리기도 합니다. 아마 남의 눈치 안 보는 자신감 때문일 겁니다.

몇 년전, 미연이가 미국에 와서 같이 쇼핑을 갔던 적이 있었는데요. 그녀는 옷과 구두를 고르면서 정말로 행복해했습니다. 한국과는 달리 미국에는 나이에 구애받지 않는 옷들이 많으니까요. 한국에는 5, 6십대 중년을 위한 옷들을 파는 가게가 따로 있습니다. 그리고 사이즈도 다르지요. 이른바 ‘마담 사이즈’. 나같은 나이대는 아줌마들, 할머니들 옷 파는 데로 가야지 그냥 쇼윈도우에 걸쳐진 옷이 맘에 들어 무작정 들어갔다가는 큰일 납니다. 위아래를 쓰윽 훑어보고는 ‘여기는 마담 사이즈 파는 데 아니예요’하는 퉁명스런 하대를 받아요.

몇 년전인가 남대문 시장에서 나도 당한 적 있습니다. 옷가게 바깥에 전시해 놓은 까만 끈달이 원피스가 예쁘길래 들어가서 가격을 물었더니 나를 흘낏 쳐다봅니다. 그리고는 내 물음엔 대답도 없이 ‘아줌마 사이즈는 없다’고 딱 잘라 말합니다. 얼마나 어이가 없고 황당하던지요. 돌아 나오면서 ‘내가 입을 게 아니고 내 딸 사줄 거거든요?!’하고 쏘아 붙여 분풀이를 한 적 있지만 하여튼 그렇습니다.

그에 비해 미국은 할머니가 틴 에이저 옷을 사든지 말든지 입든지 말든지 누가 일절 상관을 안 합니다. 또한 일단 매장에 들어가면 몇 번을 걸쳐보고 벗어보고 생 굿을 해도 누가 귀찮게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미연이는 미국에서 쇼핑하는 일이 너무나 즐겁고 행복한 것입니다. 남의 눈치 없이 마음대로 옷을 살 수 있으니까. 그러나 솔직히 미연이가 쇼핑한 옷을 보고 나는 속으로 혀를 찬 게 사실입니다. 하나같이 십대들이나 입을 옷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빨강, 진분홍, 파랑. 거기다 반짝이까지. 나 같으면 돈을 얹어주고 입으래도 못 입을 옷들입니다.

한국에 나가면서 미연이가 좋아할 만한 옷이나 장신구나 핸드백들을 사다가 주는데요. 쇼핑하기는 아주 쉬워요. 선명하고 진한 색, 야한 스타일, 그리고 반짝이가 붙은 것들 위주로 사면 되니까. 여긴 아무래도 파티 문화가 있으니까 미연이가 좋아하는 화려한 것들이 많잖아요. 작년엔 손잡이랑 몸통 전체가 반짝이로 ‘떡칠이 된’ 핸드백과 여행다닐때 앞에 차는 파우치를 사다 주었습니다. 미연이가 얼마나 좋아하던지.

미연이가 좋아하니까 나도 덩달아 좋습니다. 그래서 쇼핑을 나가면 자연적으로 미연이 것도 사게 되어요. 미연이 취향 위주로 눈을 돌리게 됩니다. 그런데요. 참 희한합니다. 자꾸 그런 쪽으로 눈길을 돌려서인지, 나이가 들어서인지 그동안은 ’돈을 얹어주고 가지래도 싫었던’ 그런 것들이 나도 슬슬 좋아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반짝반짝 눈이 부신 것들이 내 눈을 사로잡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반짝반짝’하는 것들에게는 묘한 매력이 있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집 부엌 찬장 손잡이를 모두 투명하고도 반짝거리는 재질로 갈았는데요. 영 기분이 별로다가도 형광등 불빛을 받아서, 아니면 떠오르는 햇빛을 받고 반짝거리는 그것들을 볼 때마다 기분이 확, 살아나더라 이겁니다. 그래서 나도 슬슬 반짝이들을 사들이기 시작했습니다. 욕실의 비누받침. 화병. 케잌 나이프 등등. 얼마 전에는 인터넷에서 우연히 반짝이로 칠갑한 강아지 밥그릇을 봤습니다. 멀쩡한 밥그릇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누가 사갈새라 얼른 구입 버튼을 눌렀습니다.

앞 전체를 비롯해 뒷굽까지 반짝이로 도배한 구두도 샀습니다. 신데렐라 구두처럼 화려하고 빛나는. 사면서도 이 구두를 신고 나갈 곳도 없고 있다 한들 신을 용기도 없을 것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맞아요. 송년회 파티 때 한 번 신기는 했는데 너무 부담스러워서 그 후론 그냥 신발장 신세입니다. 그렇지만 가끔 꺼내볼 때마다 기분이 좋아요. 다시 또 신지 못한다해도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전환이 되니 본전은 뽑은 것 같아요.

며칠 전 잡지에서 ‘나이가 들면 왜 빨간색과 반짝이는 게 좋을까’란 글을 보았습니다. 서울 거주 노인층 남녀 715명에게 어떤 색상과 스타일의 옷을 선호하는가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했는데 빨강 주황 등 붉은 색 계통의 등산복 스타일이 가장 많았다고 합니다. 아울러 여성들은 레이스나 단추 장식보다는 반짝이가 장착된 옷이 좋다고 대답했답니다. 이 신문은 이 같은 현상을 ‘노년이 되면 눈의 노화가 진행됨에 따라 백내장과 같은 질병으로 인해 색깔 구분이 잘 안 된다. 수정체가 혼탁해지는 백내장이 오면 빨강 계통이 수정체를 잘 통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눈에 확 뜨이는 원색과 조명효과를 주는 반짝이를 선호하게 된다’고 결론을 지었습니다.

맞는 것 같아요. 반짝이랑 원색을 좋아하는 현상은 내 지인들에게도 나타나거든요. 젊을 땐 천박하다고 쳐다도 안 보던 빨강, 노랑 등 밝고 튀는 색 아니면 반짝거리는 게 좋다고 너도나도 입을 모읍니다.

젊을 때 외교관까지 지낸 한 지인은 늘 고상하고 세련된 취향이었는데요. 하루는 전화기 커버를 교체하러 갔는데 점원이 권해주는 여러가지 스타일은 반눈에도 안 차더니 구석탱이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반짝이 커버가 마음에 꼭 들어서 얼른 샀답니다. 지인이 전화기를 꺼내 보여주는데 반짝이도 그냥 반짝이가 아니예요. 빨강과 주황색이 어루러진, 한국의 유흥가 거리에 위치한 나이트 클럽의 네온사인같은 요란한 것입니다. 사실은 내 전화기도 만만치 않습니다. 투명한 반짝이로 뒤덮인 것이지요. 나는 내 전화기를 꺼내 그녀의 전화기와 나란히 놓았습니다. 식탁 위의 전등 불빛을 받아 미친 듯이 명멸하는 두 전화기. 우리는 마구 웃었습니다. 나이가 드니까 어쩔 수가 없구나하는. 나름 하늘을 찌르던 고급 취향들이 나이가 드니까 이렇게 하나로 통일 되네 하는 자조적인 웃음이었지요.

이계숙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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