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숙 작가의 살아가는 이야기] 네 주제를 알아야지

사진은 한국의 친구 영선이가 길 가다가 찍었다는 어느 집의 장미꽃 무더기.
언제 한번 이 주제에 대해 이야기한 적 있지만 한국의 친구들과 일상을 나누고 소통하려 개설한 SNS, ‘카카오 스토리’가 있어요. 여기에 심심찮게 남자들로부터 친구 맺자는 요청이 들어옵니다. 대부분 외국남자들입니다. 사진을 보면 거의 다 키 크고 덩치좋고 젊고 잘생긴 남자들이지요. 간혹 중년도 있는데요. 중년이라해도 수트광고나 향수광고에서 빠져나온 것같이 중후하고 점잖고 매력있어 보이는 근사한 남자들.

직업들도 엄청 좋은 것 같습니다. 의사, 대기업 중역, 파이롯트, 아니면 군 장성 등입니다. 하나같이 흰 의사 가운에 청진기를 걸친 모습들이거나 군대 막사 아니면 헬리콥터 등 군부대 시설물 앞에서 포즈를 취한 모습들, 아니면 영화에서나 나올 것 같이 고급스럽고 클래식한 사무실에서 일에 열중하고(누가 사진을 찍어 주었을까요?)있는 모습들. 사진만으로도 반할 것 같아요. 입이 헤, 벌어질 것 같아요. 그런데요. 뭐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위에 묘사한 멋진 남자들이 뭐가 아쉬워서 나같이 보잘 것없이 다 늙은 할매한테 친구 요청을 해 올까요? 가만히 있어도 젊고 예쁘고 섹시한 여자들이 줄을 설 건데. 그렇습니다. 그냥 딱 봐도 100% 사기입니다. 이른바 로맨스 스캠.

온라인 기반의 데이팅 앱이 활성화 되면서 멋진 사진으로 이성에게 접근해 환심을 산 뒤 금전을 갈취하는 로맨스 스캠이 미국에서 기승을 부리고 있다고 합니다. 사실은 사진 속의 남자들도 피해자입니다. 그들은 몰라요. 자신들의 사진이 저렇게 악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나이지리아 등 빈곤국에 거주하는 범죄자들이 조직적으로 SNS에서 사진들을 골라내는 작업을 한 뒤, 그렇게 무단 도용한 사진들을 바탕으로 사기행각을 벌이고 있기에 말입니다.

지난 달 18일, 인터넷 정보업체인 ‘소셜 캣피쉬(Social Catfish)’는 미 연방 수사국의 데이터를 취합 분석해 지난 해 미국에서 발생한 로맨스 스캠의 피해액 규모가 총 13억 달러에 이른다고 발표했습니다. 2021년의 5억 4천 7백만 달러보다 138% 증가한 수치이며 2018년 1억 4천 5백만 달러보다 자그마치 9배나 늘어난 수치라고 하네요. 재미있게도 캘리포니아 주가 피해자 2천 189명에 1인당 평균 피해액 7만 2천 239달러, 총 피해액1억 5천 810만달러로 미국 50개 주 중 1위를 차지했다고 합니다. 명예롭지 못한 1위이네요. 소셜 캣피쉬는 ‘정부 당국이 주의를 당부하고 데이팅 앱 사기를 다룬 다큐멘터리가 방영됨에도 불구하고 로맨스 스캠 규모는 갈수록 방법이 교묘해지고 더 확장되고 있다‘고 우려를 표했습니다.

플로리다주의 피치스 스터고라는 올해 서른 여섯살의 여성은 온라인 데이팅 사이트에서 만난 예순 일곱살의 남성으로부터 총 283만 달러를 사취한 혐의를 받고 있다고 합니다. 피치스 스터고는 이 돈으로 고급 주택을 구입하고 오성급 호텔에서 휴가를 보내는 등 호화생활을 누렸다고 하는데 예순 일곱살의 남성이 이 여자에게 털린 돈은 평생 모은 돈이라고 하네요. 왜 안 그렇겠어요. 돈을 쓸어담는 큰 사업을 하지 않는 이상 한푼 두푼 모은 피같은 돈이겠지요. 그런데 이 할배도 참 한심합니다. 고소하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자기 나이를 먼저 자각했어야지. 자기 주제를 알았어야지. 손녀 딸같은 여자에게 흑심을 품다니. 아무렴 배 이상 나이차이 나는 여자가 자기를 좋아해 주려고. 딱 보면 돈이지.

사기를 치는 놈들이야 물론 나쁘지요. 죄를 지어 감옥에 수용되어 있는 죄인들 사이에서도 소아대상 범죄자와 사깃군은 인간대접을 못받는다고 들었습니다. 상대의 선한 마음을 이용하고 기만하는 행위는 그만큼 나쁘다는 것이지요. 그런데요. 거기에 현혹되는 사람은 더 나쁘다고 생각합니다. 사기를 당하는 사람을 가만히 살펴보면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착하고 순하고 남을 잘 믿는 성격의 소유자인 탓도 있지만 대부분 가당치도 않은 욕심을 부려서입니다. 내가 처한 상황은 생각치 않고 눈 높이를 에베르트 산처럼 높인 까닭.

결혼상담소에서 만든 점수표에 가끔 최고 점수를 받은 신랑신부의 신상이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이, 외모, 직업, 학벌 등 한 미혼의 인간이 가진 조건과 배경을 고기 등급 나누듯 점수로 매긴 신랑신부감 신상표입니다. 재미로 이 표에다 나를 오버랩시켜 보는데 쓴 웃음이 저절로 납니다. 최하위입니다. 밑바닥도 모자라 땅을 파고 내려가야할 판. 이 등급표대로라면 나는 결혼 한번 못한 채 늙어죽어도 시원찮을 점수입니다. 서글프게도. 내가 기혼이라 얼마나 다행인지 안도의 한숨마저 나온다니까요. 얼마전부터 한 인간이 가진 배경을 ‘수저’로 표현하는 풍조가 생겼지요. 금수저, 은수저, 동수저, 흙수저. 누가 시작을 했는지 보통 기발한 게 아니네 재밌어하면서 나는 어느 수저에 해당될까, 찾아 보다가 풀이 팍 죽은 적 있는데 그때 느꼈던 비애를 또 느껴야 했거든요. 나는 흙수저 축에도 못껴요. 먼지수저라고 할까? 아니면 녹이 시퍼렇게 슨 수저?

20 여년 전. 혼자 이 풍진 세상을 헤치며 오랜 세월을 살다가 결혼상대를 찾아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나는 눈 높이를 0로 낮추었더랬습니다. 음, 낮추었다기보다 내 주제를 잘 파악하고 있었다고 해야 맞겠습니다. 위에 쓴대로 나야말로 외모는 물론이고 직업, 배경, 학벌 등 그 어느 한가지도 내세울만한 것이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거든요. 그래서 주위에서 나름 조건이 괜찮은 사람을 소개하겠다는 제의가 들어왔어도 언감생심 꿈도 꾸지 않았습니다. 덥썩 만나러 나갔다가 상처만 받느니 내 주제랑 잘 맞는 남자를 만나겠다고 거절했지요. 눈이 제대로 삐지 않은 이상 나를 배우자로 삼을 남자가 없다는 걸 알았기에. 외국남자로 눈을 돌린 건 그런 이유때문이었습니다. 적어도 외국남자는 이것저것 따지지 않을 것 같았거든요.

로맨스 스캠의 피해자가 되는 이유는 내 주제를 잘 모르는 이유가 가장 크다고 생각합니다. 하류계층에 있는 내 주제는 생각 못하고 운 좋게 상류계층으로 신분상승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눈이 삔 남자를 통해 의사 부인이라도 될 수 있을까, 큰 회사 회장 사모님이라도 되어 볼 수 있을까하는 요행심과 허영심. 내가 탐 내는 조건의 남자 여자라면 남들도 탐을 낼 것입니다. 설마 내 차례까지 오겠어요? 중간에 누가 가로채가도 가로 채갔지.

신데렐라 스토리는 그나마 동화 속에서만 가능하다고 했는데요. 요즘 아이들은 영악해서 동화조차도 믿지 않는대요. 이제 신데렐라는 없습니다. 주제를 모르는 사람을 이용해 먹으려는 사깃꾼만 있을 뿐.

이계숙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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