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숙 작가의 살아가는 이야기] 이제는 수다를 멈출 때, 입을 닫을 때

사진은 현 임 씨가 보고 싶다고 요청하신 블링블링 강아지 밥그릇.
최근 우연히 알게 된 여성이 있습니다. 오래전부터 내 글을 좋아했다는 여성입니다. 집도 가깝고 나이도 같고 취향도 비슷해서 잘만하면 아주 좋은 친구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예전처럼 덥석 급하게 인연을 맺는 게 주저됩니다. 조건만 보고, 겉만 보고 가까워졌다가 쓴 경험을 몇 번하고부터입니다. 일단은 어떤 사람인지 자세하게 알아보고 친해져도 늦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뜸을 들이고 있던 중 이 동네에서 오래 산 Q씨를 만날 일이 생겼어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다 마치고 지나가는 말처럼 위에 쓴 여성에 대해 물어봤습니다. 친절하고 대화도 잘 통하고 남을 배려하는 좋은 성격인 것 같아서 친하게 지내보려 한다고. 그러자 대뜸 Q씨가 손사래를 칩니다. 그러면서 말합니다.
“그 여자 못 써. 사생활도 문란하고 생전 커피 한 잔 안 사는 짠순이에다 성격도 엄청 이기적이고 괴팍해. 무조건 자기중심적인 몹쓸 사람이야”
“그래요? 굉장히 예외네. 전혀 그래보이지는 않던데요…”
Q씨가 뭐라고 더 나쁘게 내가 물어본 여성에 대해서 말을 하는데 갑자기 등에서 소름이 오소소 돋더군요. 나라는 사람은 Q씨한테 어떻게 비춰지고 있을까 싶은 생각에요. 다른 사람들한테 어떤 식으로 나를 평가했을까 싶은 생각에요.

Q씨 말대로 어쩌면 그 여성은 사생활도 문란하고 생전 커피 한 잔 안 사는 짠순이에다 성격이 보통 아닐지도 모릅니다. Q씨한테만은요. 다른 사람한테 물어보면 정 반대의 대답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왜냐면 Q씨가 위의 여성을 잘 못 알고 있는 거일지도 모르니까요. 사람은 대체로 단편적인 것만 보니까요. 부처님같은 사람을 두고도 일단 나한테 밉보이면 ‘상종 못할 사람’ 혹은 ‘형편없는 사람’이란 혹평을 서슴치 않는 게 우리들입니다. 극악무도한 살인마라 해도 나한테 친절하고 잘하면 아주 괜찮은 사람이라고 평할 수도 있어요. 내가 아는 게 다가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도 다 아는 것처럼 떠벌리고 다니는 실수를 하지요.

얼마전 일입니다. 화단에 물을 주러 앞뜰에 나갔다가 경찰차 두 대가 급히 집 앞을 지나가는 광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고개를 빼고 보니 경찰차는 몇 집을 지나쳐서 한 집 앞에 멈추었습니다. 한국인 부부가 사는 집입니다. 아이구야, 드디어 일이 터졌구나! 나는 집 안으로 뛰어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남편에게 알렸습니다. 한국집에 경찰차가 두 대나 출동했다고. 모르긴해도 그 남자가 부인에게 폭력을 휘둘렀기에 경찰이 왔을 거라고. 남편이 눈을 둥그렇게 떴습니다.

우리랑 예닐곱집 떨어진 곳에 사는 한국인 부부. 이사온지 5,6년 쯤 되었을 겁니다. 평생을 타주에서 살다가 직장을 은퇴하고 집값이 싼 우리동네로 이사왔다고 합니다. 친화력이 뛰어난 나는 웬만한 사람들하고는 다 알고 지내지만 그집 부부와는 거리를 두었습니다. 이사오면서 십년 넘게 키우던 늙은 개를 공원에다 버리고 왔다는 이야기를 들었기에요. 개를 버린 사람답게 육십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남편의 인상이 아주 고약합니다. 웃는 모습을 본 적 없습니다. 한겨울에도 흰 런닝셔츠바람에 줄담배를 피우면서 차고 안에서 뭘 뚝딱거리는데 내가 먼저 아는 체를 해도 그냥 어, 할 뿐입니다. 생전 먼저 인사 안 하는 것은 물론이고. 큰 소리로 전화통화하는 것도 오다가다 가끔 듣는데 욕설도 잘 하고 비속어도 잘 씁니다. 몰상식한 사람같습니다. 부인 역시 인사를 안 하기는 마찬가지. 허수아비처럼 비쩍 말랐는데 남편에게 쥐어 사는 것 같아요. 안색이 늘 어둡고 지쳐보입니다. 가끔 남편의 고함소리가 문 밖에까지 터져나오지만 여자는 말대꾸 한 번 안 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단편적인 것만으로도 가정폭력을 당하면서 산다고 내심 짐작하고 있던 나였습니다. 그러니 경찰차가 오자 단박에 남자가 여자에게 폭력을 쓴 것으로 지레짐작 한 거지요.

내 수선에 얼른 밖으로 나가봤던 남편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들어옵니다. 그러면서 말합니다. 한국집이 아니라고. 한국집 바로 옆집이라고. 눈이 지독히 나쁜 나입니다. 남편이 아니었다면 나는 한국집에 경찰차가 출동한 것으로 백프로 단정했을 겁니다. 다음날 사람들에게 소문냈겠지요. 남자가 여자를 폭행해서 경찰차가 두 대나 출동했었어. 내 눈으로 똑똑히 봤지. 한줌밖에 안 되는 여자를 때릴 데가 어디 있다고. 하여튼 폭력 쓰는 놈들은 다 철창에 집어 쳐넣어야 해….

비슷한 일이 또 있었습니다. 나는 반지나 목걸이 등 몸에 붙이는 장신구를 안 좋아하지만 시계를 꼭 찹니다. 외출 시 시간을 가늠할 때마다 전화기를 꺼내는 게 귀찮으니까. 가죽줄, 쇠줄해서 의상에 맞추어서 열 몇개가 있을 때도 있었지요. 지금은 다 남을 줘버려서 서너개 밖에 없어요. 문제는 이 시계의 건전지입니다. 한국갈 때마다 몽땅 가져가서 건전지를 다 교체해 오곤 하지만 그래도 건전지가 죽는 시계가 가끔은 나옵니다. 그러다가 주말마다 서는 플리마켓에 갔다가 단돈 5불에 건전지를 교체해 주는 곳을 알아 냈습니다. 수염이 얼굴을 다 덮은 중동인이 하는 곳이었습니다. 얼마나 반갑던지요. 그래서 늘 그곳에 가서 건전지를 교체했습니다. 일일이 한국까지 가지고 갈 필요없이.

서너달 전 쯤이었습니다. 그날도 건전지 교체가 필요한 시계들을 챙겨 들고 플리마켓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늘 자리를 지키고 있던 그 시계 수리업자가 안 보입니다. 남편 옆자리에서 핸드백을 팔던 부인만 있습니다. 그녀는 남편 자리에까지 핸드백을 잔뜩 늘어놓고 팔고 있었습니다. 할 수 없이 다른 곳에게 가서 건전지를 갈았습니다. 한 달 후쯤 모자를 사러 지인이랑 갔었는데 역시 그 남자는 안 보였습니다. 지난번 같이 부인의 핸드백들이 남자의 좌판을 점령했더군요. 나는 짐작했습니다. 남자가 죽은 거라고. 아직 한창인 부인을 두고 죽어버린 거라고. 그래서 나는 같이 간 지인에게 말했습니다. 졸지에 남편을 잃은 불쌍하고 가엾은 부인을 위해 뭐라도 하나 팔아줘야 한다고. 지인을 재촉해 지갑을 사게 하고 나 역시 마음에 들지도 않은 핸드백을 하나 샀어요.

그리고 지지난 주, 누가 화분을 사야 한다면서 플리마켓에 간다길래 동행했습니다. 어머나, 이게 웬일! 그 수리업자 남자가 멀쩡하게 살아있습니다. 예전처럼 좌판을 벌이고 열심히 시계를 만지고 있어요. 나는 한달음에 쫓아갔습니다. 그리고 큰 소리로 외쳤어요.
“올 때마다 당신이 안 보이길래 죽은 줄 알았다! 무슨 일로 한동안 안 보였었나? 어쨌거나 이렇게 다시 보니 너무너무 반갑네!”
내 호들갑에 남자가 의아한 얼굴로 말했습니다.
“무슨 소리하고 있는 거냐? 나는 한 주도 빼지않고 여기 이 자리에 있었는데?!”
알고봤더니 그는 일요일에만 좌판을 여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동안 토요일에 갔었던 거고. 플리마켓이 주말에만 여니까 당연히 토, 일요일 이틀간 장사를 할 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갈 때마다 안 보이니까 덮어놓고 죽었다고 판단했던 겁니다.

흔히 말합니다. 나이 들면 입은 닫고 지갑을 열라고. 그 말이 그렇게 억울할 수가 없었어요. 늙은 게 죄도 아니고 열라고 달린 입을 왜 닫으라고 하나 싶어서요. 지갑이야 젊을 때부터도 항상 누구에게나 열려 있었으니 새삼스러울 게 없었던 나. 그래서 입도 늘 열고 있었습니다. 어느 자리 가나 제일 많이 떠들고 동네 소문 제일 많이 옮기고. 이제야 깨닫습니다. 더 큰일 나기 전에, 더 망신 당하기 전에 입을 닫아야 한다고. 평생 활짝 열려 있던 입을 이제는 닫을 때라고.

이계숙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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