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숙 작가의 살아가는 이야기] 한국사람들의 양심을 비웃었더니

양파즙으로 위장한 흑염소액.
고향에 도착한 지 사흘 째가 되었는데도 내가 기력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큰동생이 전화했습니다. ‘영양주사’를 맞아 보랍니다. 한국에서는 조금만 기운 없으면 너도나도 맞는 흔한 주사라면서. 특정 병원이 아닌, 아무 의료기관에서나 예약없이 맞을 수 있다면서. 동생의 권유를 듣기로 했습니다. 주사라도 맞고 일단 기운을 차려야 친구들도 만나고 스케줄을 소화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영양주사 6만원’이라고 써붙인 가까운 이비인후과를(한국은 이비인후과에서도 그런 주사를 놓네요)찾아갔지요.

아침 아홉시, 문이 열리자마자 갔는데도 내 앞에 열 댓명이나 기다리고 있어요. 삼,사십분을 기다려 의사와 면담할 수 있었습니다. 의사가 내 인적사항이 적인 종이를 들고 물어요. 미국에서 언제 왔냐고.(주민등록 번호가 없다고 했더니 여권번호를 적으래서)이틀 전에 도착했다고 대답했습니다. 코로나 검사 여부를 확인하기에 어제해서 오늘 아침에 ‘음성’문자를 받았다고 했더니 ‘신속항원 검사’를 또 하랍니다. 신속항원 검사를 하고 간호사로부터 영양주사를 맞을 수 있었습니다.

돈을 내러 갔더니 9만 8천원이랍니다. ‘영양주사 6만원’이라고 써붙인 글귀는 뭐냐고 의아해 하니까 접수처 아가씨가 말합니다. ‘신속항원 검사비’가 3만 8천원이라고. 그러면 그만큼 받는다고 미리 언질을 주었어야지. 그랬으면 마음이 달라졌을 수도 있었을 텐데. 또한 한 시간 전에 분명히 음성으로 뜬 결과를 받았다고 했는데 무슨 검사를 또!? 바가지를 옴팡 쓴 기분이었지만 돈 3만 8천원을 가지고 실랑이를 할 기분이 아니라서 그냥 다 내고 집으로 돌아왔어요. 그러나 괘씸하고 황당하고 어이 없는 기분은 지울 수 없었습니다. 올봄에도 치과에서 바가지를 씌우려 했었다고 글에 썼지요. 미국에서 두어시간에 끝났던 치료를 한달에 걸쳐하라고 했고 또한 필요도 없는 신경치료도 권유했었다고.

친구에게 말했더니 안타까와 죽으려고 합니다. “의료보험이 있었으면 6천원이면 되는데 외국에서 왔다니까 바가지를 씌웠네. 미리 나한테 말했으면 내 의료보험증을 주었을 걸. 아니면 네 올케 의료보험을 썼어야지. 모두 전산화가 되어 있어서 의료보험증을 확인도 안 해, 요즘은. 그냥 주민등록 번호만 가르쳐 주면 되는데. 아이고, 아까워라! 생돈 3만 2천원!”

남의 의료보험 카드를 써서 혜택받는 것은 불법 아니냐고 했더니 친구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말합니다. 누구나 다 그렇게 한다고. 일본에 사는 자기 외사촌도 한국에 와서 그런 식으로 적잖은 치료를 받고 갔다고. 그녀의 말에 나는 쯪쯪 혀를 찼습니다. 그리고 비웃음을 섞어 말했습니다.

“누구나 다 그렇게 한다고 나까지 그런 불법을 자행하면 어떻게 해. 나는 그러고 싶지 않네. 한국에 세금 한 푼 낸 적 없는 해외동포들인데 그런 편법으로 혜택을 받으면 안 되지. 사람이 양심이라는 게 있는데…”

아울러 나는 미국 사람들이, 미국에 사는 우리 동포들이 얼마나 정직하고 양심적인지 예를 들어가며 역설했습니다. 새벽 서너시, 길에 개미 새끼 한 마리 지나가지 않아도 빨간 신호등에는 칼같이 차를 세우는 사람들이 바로 미국 사람들이라고. 아무리 바쁜 러시아워에도 응급차 사이렌 소리가 나면 너나 할 것 없이 길을 터주는 사람들이 바로 미국 사람들이라고. 주차장 전체가 바늘 꽂을 틈 없이 다 차로 차있어도 장애인 주차칸은 늘 텅텅 비어있는 곳이 미국이라고. 적발되면 눈물이 날 만큼 높은 벌금 때문이긴 하지만 미국인들은 준법 정신이 생활화 되어 있다고.

침을 튀겨가며 내 남편 이야기도 했지요. 남편이 취미로 금을 캐러 다닙니다. 헛탕이 일쑤지만 가끔은 ‘심봤다’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렇게 심봤다한 금을 모았다가 한 번씩은 팔기도 하는데 금 판 돈을 수입으로 잡아서 1전 하나 틀리지 않게 세금보고를 합니다. 아무도 없는 깊은 산 속에서 혼자 캔 금이라 그 누구도 출처를 모르는 데도 불구하고요.

“ ‘정직’과 ‘양심’이 미국을 이끌어가는 원동력이야. 누가 보든 안 보든 정해진 규칙과 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미국사람들의 정직한 양심들이 있기에 세계 최고의 강대국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거지. 나 하나쯤은이 절대로 통하지 않는 곳이 바로 미국이란 나라란다…“

그런데요. 사람 일은 모릅니다. 그렇게 정직과 양심에 관한 일장연설을 하면서 정의로운 척 했던 내가 며칠 후 양심을 속일 일이 생길 줄 어찌 알았겠어요. 바로 흑염소액 때문이었습니다. S엄마한테서 전화가 온 거예요. 먹다가 남은 흑염소액을 미국으로 어떻게 가져갈 거냐고요. 엄마야!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한 달치 정도를 예상했던 흑염소액이 자그마치 석 달분이라 무게만 걱정을 했지 ‘동물성 성분’은 미국으로 반입할 수 없다는 데까지는 생각이 못 미친 것이었습니다. 불에 덴 듯 놀라서 인터넷을 뒤졌지만 결과는 절망. 미국 세관에서 다 압수하니 일찌감치 포기하라는 정보 뿐이었어요. 아닌게 아니라 몇 년전 홍삼액 세트를 샀다가 미국세관에 걸려 곤욕을 치룬 적이 있습니다. 홍삼액에 ‘녹용성분’이 들었나 샅샅이 조사를 하더군요. 병 뒤에 한글로 씌여진 성분표를 사진으로 찍어 영어로 번역까지해서 읽어볼 정도로 철저하더라고요. 조금이라도 녹용성분이 섞인 홍삼액은 모두 압수 후 폐기처분.

큰 박스 세 개에 꽉꽉 눌러지듯 담겨진 흑염소액을 앞에 놓고 나는 눈앞이 캄캄했어요. 전자렌지에 데우면 전자파가 영양파괴를 할 것 같아 중탕까지 해서 복용했을 정도로 정성을 기울이던 것들을 가져가지 못하다니!

다음 날 큰동생이 왔다가 내 코가 석자나 빠진 것을 보더니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한의원에다가 흑염소액을 도로 갖다 주잡니다. 가위로 잘라서 액을 빼낸 다음에 다시 재포장해달라고 하면 된다는 것이었어요. 그러니까 녹용그림이 그려진 비닐 패키지를 식물그림이 그려진 패키지로 바꾸자는 말이었어요. 동생이 의기양양하게 말했습니다.

“이왕이면 양파그림이 그려진 걸로 재포장해 달라고 부탁해 볼께요. 미국 세관원이 뜯어서 맛을 보지 않는 이상 흑염소액인지 양파즙인지 겉 모습을 보고 어찌 알겠소?혹시라도 세관원한테 걸리거든 무조건 양파즙이라고 박박 우겨요!”

나는 동생의 말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무슨 편법을 써서라도 흑염소액을 미국으로 가져가야 했고 사수해야 했으니까. 압수당하면 안 되니까.

한국은 모든 게 참 빨라요. 갖다 준 지 단 하룻만에 ‘양파즙’으로 위장된 흑염소액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뜯어서 맛을 보지 않고는 그 누구도 알아챌 수 없을 만큼 감쪽같더군요. 나는 비장한 마음으로 그것들을 가방에 꾸렸습니다. 세관신고서에 반드시 대답해야 하는 ‘동물성 음식물’을 지참 사항에 ‘노’라고 기입하기로 작심까지 하면서.

미국 샌프란시스코 공항. 다행스럽게도 세관신고서를 작성하지 않아도 되더군요. 올해 초부터 세관신고서가 없어졌답니다. 짐검사도 안 합니다. 승객 열 댓명을 모아놓고 세관원이 그냥 말로 물어요. ‘라면’ ‘순대’같은(덩치가 산 만한 흑인 세관원이 라면, 순대라는 발음을 얼마나 정확하게 하던지!)육류가 들어간 음식을 가져온 사람 있느냐고. 모두들 ‘노’라고 대답하더군요. 물론 나도 ‘노’했지요. 아마 나의 ‘노’소리가 가장 우렁차고 씩씩했을 겁니다.

우리들의 양심을 믿은 맘좋은 세관원이었습니다. 별도의 짐 검사없이 나를 비롯한 열댓명의 승객들을 순순히 보내주었거든요. 양파즙으로 위장한 흑염소액으로 가득 채운 가방을 밀고 나오는데 뒷통수가 뜨거웠습니다. 필요에 따라 왔다갔다하는 나의 양심이란 생각이 들어서였습니다. 앞으로 나는 양심이란 주제에 대해서는 참견하면 안 됩니다. 그저 입 다물고 잠자코 엎드려 있어야 합니다.

이계숙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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