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현진 칼럼] 우리는 무엇을 자랑할 것이 있는가

한인 미국 이민사를 보면 1902 년 인천 내리교회 교인 50 명과 부두노동자 어부 상인 학생 등 120 명이 갤릭호를 타고 제물포를 떠나 1903년1 월13일 하와이에 도착했다. 그렇게 시작한 한인 이민사가 이제는 120 년이 되었고 재미동포 수도 2백만명이 넘었다고 한다.

그동안 한인 사회는 질적 양적 변화는 타민족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발전했다. 그 중에서 역사학도인 저의 입장에서 볼 때 십 년전 당시 한인 회장 토마스 김이 샌프란시스코 주간 한인 이민사를 발간한 것은 그 무엇보다 뜻있는 일이었다.

나는 이 지면을 통하여 한인 이민사와 더불어 중국 일본인들이 샌프란시스코 주변에 정착 하면서 겪었던 과정을 소개하면서 오늘을 살아가는 한인 역사를 간단히 쓰고자 한다.

1902년 최초로 이민 온 한인들은 문화와 언어 기후가 다른 낯선 땅에서 살아 간다는 것은 정말 견디기 어려운 고역이었다고 한다. 그들이 어려운 고통을 참고 견딜 수 있었던 것은 깊은 신앙심과 조국의 광복을 염원하는 애국심 때문에 그 시련을 이겨낼 수 있었다고 한다.

지금 우리 한인들이 깊이 생각할 것은 최초의 이민자들이 그 어려움 속에서도 조국 광복을 위하여 돈을 아껴 광복 운동을 하는 단체의 지원 해 준 것을 알았을 때 우리는 지금 모국에 무엇을 보태 주고 있는가 한번 생각해 보자. 일부 한인들은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모였다 하면 한국 비판, 좌파 우파 하며 정치이야기로 날새는 일, 심지어는 평통을 하려고 영사관 주변을 넘나드는 대표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한번 우리의 주변을 보자. 독자들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깊이 반성 할 때다. 자칭 지도자들 부끄럽게 않은가.

그러면 중국 이민자들의 역사를 보자 1890년도 부터 시작된 중국 이민자들의 역사도 순탄치 않았다. 초기 이민자들은 샌프란시스코 땅에 발을 디디기 전 엔젤섬에 수용 후 입국심사를 거쳐야 했다. 그때 중국인들은 입국심사를 받기 전 영양실조로 죽은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다행이 살아남은 사람들은 미 대륙 첨단 철도공사에 동원되어 노예 같은 대우를 받으며 힘든 노동을 했다고 한다.

그렇게 힘들게 일하면서도 중국인들은 힘들게 번 돈으로 공동으로 땅을 구입 하고 남는 돈으로는 뒤에 오는 이민자들을 돕는 자금을 마련 하여 그들을 도왔다고 한다. 특히 중국인들은 지금의 차이나타운에서 음식점을 열어 번 돈으로 지역 사회 돕는 일도 많이 했다고 한다. 그들의 노력으로 샌프란시스코 시장, 고급 공무원 다수가 배출 되어 명실공히 샌프란시스코는 차이나타운 대명사로 쓰여지고 있다.

다음으로 일본인들의 역사를 보자. 일본인 역시 1900년대 부터 시작한 이민자들이 샌프란시스코보다 주변 외곽지역에서 농사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특히 오클랜드와 새크라멘토 지역에서 경제 기반을 잡았다. 그러던 중 1939년 세계 2차 대전시 미국 정부는 그때 적대국 이민자라 하여 샌프란시스코 변두리 와 새크라멘토 루미스 지역에 강제수용소를 만들고 감금 시킨 일도 있었다.

77 년이 지난 지금도 루미스 마을에는 그들이 겪었던 고통을 남긴 기록물들이 많이 남아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샌프란시스코 지역에도 아직도 그들의 문화를 상징하는 사적지도가 많다. 특히 일본인들은 그런 200년이 되어 가는 때 까지도 Japan 베일 뉴스를 발간 하여 그들의 소식을 알리는 일까지 했다.

우리는 그들의 이민 정신을 본 받아야만 한다. 그럼 우리 한인 역사라고 하기 보다 한인들의 사회 상을 보라 얼마전 22년 중간선거에서 한인 다수가 미 의회에 진출하고 정부 관료로 등용 되는 성과도 있었다. 그러나 북가주 지역 한인사회는 어떠한가.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미 주류 사회나 한인사회 속에서 한인 단체장들은 무엇을 했으며 무엇을 자랑할 것이 있는가. 있으면 말해 달라, 내가 쓰겠다.

솔직히 말해 한인 이민사 중 샌프란시스코 지역에 본격적으로 이민자가 몰려 들기 시작한 것은 70 년대 부터였다 그렇다면 50 전 이 지난 지금 한인지도자들은 무엇을 했는가 우리는 정말 자랑할 것이 없다. 단지 부끄럼 뿐이다. 각성 해야 한다.

지금 중국 일본인 단체는 20년 전 막을 내렸다. 그렇지만 그들의 후세들은 APCC(Asian Pacific Community Center)를 만들어 아시안 태평양 연안 피지 한국만 아니라 월남 라우스 등 아시아인들을 돕는 일을 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 한인은 아무도 참여 하지 못하고 있다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

이제 우리 한인들이 할 일은 우리 2세들이 살아나가야 할 이 땅에 한국인을 얼 (identity)어 주는 일이다. 그 중심에는 한국 학교가 있고 교육 봉사자들이 있다. 그들에게 깊은 격려와 응원을 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마지막으로 할 일이다.

강현진 새크라멘토 교육문화원 이사장 강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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