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해고에서 출발한 이야기…카메라의 권력과 윤리 성찰
“나는 이들의 이야기를 할 자격이 있는가. 이들의 이야기를 전하는 나의 태도는 무엇인가.”
이창동 감독이 신작 ‘사랑해도 될까’의 출발점을 설명하며 꺼낸 질문이다. 대규모 정리해고와 노동자들의 고통을 영화로 옮기려던 시도는, 타인의 삶을 이야기하는 영화감독 자신의 자격과 윤리를 묻는 오랜 고민으로 이어졌다.
10월 2일 밀밸리 다운타운 세쿼이아 시네마 2관에서 열린 제49회 밀밸리 영화제 ‘가능한 사랑’ 상영 후 질의응답에서 이 감독은 작품의 구상 과정과 배우들의 참여, 영화 속 카메라가 만들어내는 권력 관계, 공간에 담긴 한국 사회의 역사까지 자세히 설명했다. 이날 한국인 최초로 영화제 오퇴르상을 받은 이 감독은 관객과의 대화를 통해 자신의 영화가 던지는 질문들을 풀어놓았다.
대화는 ‘박하사탕’, ‘버닝’을 비롯한 영화와 소설에서 계급과 노동, 사회적 불평등을 꾸준히 다뤄온 이 감독이 이번 작품을 어디에서 시작했는지 묻는 질문으로 시작됐다.
이 감독은 ‘가능한 사랑’이 10여 년 전 한국에서 벌어진 실제 사건에서 비롯됐다고 밝혔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한 대기업이 전체 노동자의 약 40%에 해당하는 2,000여 명을 정리해고했고, 이에 맞선 노동자들의 파업은 강경한 경찰 진압으로 이어졌다.
그는 당시 사건 자체가 큰 충격이었으며, 한국 노동운동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올 사건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해고된 노동자들이 겪은 고통은 일자리를 잃었다는 사실만으로 설명할 수 없었다.
이 감독은 “해고된 노동자들이 가장 힘들어했던 것은 단순히 해고됐다는 사실이 아니었다”며 “한국 사회가 더 이상 자신들의 편에 서지 않는다는 것, 노동자의 권리보다 시장의 이익을 선택한다는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신자유주의의 거대한 흐름이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상황에서 노동자들이 깊은 상처를 입었다고 돌아봤다. 해고된 사람들과 회사에 남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죽은 자’와 ‘산 자’로 구분할 만큼 서로의 처지가 갈라졌고, 해고된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갈등과 미움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이 감독은 이 과정에서 노동자와 가족을 포함해 30여 명이 스스로 목숨을 잃는 비극이 이어졌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이들의 삶을 이야기하고 싶어 취재와 조사에 나섰고, 시나리오를 쓰고 제작 준비도 진행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당사자들의 삶과 고통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확신보다 자신의 태도에 대한 질문이 커졌다.
“이 사람들의 삶과 고통에 가까이 갈수록 나는 계속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는 이들의 이야기를 할 자격이 있는가. 이들의 이야기를 전하는 나의 태도는 무엇인가.”
이 감독은 영화인으로서의 윤리에 관한 질문을 해결하지 못했고, 결국 당시에는 작품을 완성할 확신을 얻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사회적 비극을 알리는 일이 필요하다는 생각과, 그 고통을 영화의 소재로 가져오는 행위에 대한 망설임이 함께 있었던 셈이다.
오랫동안 멈춰 있던 프로젝트에 새로운 길을 제시한 사람은 공동 각본가 오정미였다. 이 감독은 오 작가가 다큐멘터리 감독의 시선과 관점을 이야기 안으로 가져오자는 제안을 했다고 밝혔다.
그는 “그때 비로소 이것이 타인의 고통에 관한 이야기일 뿐 아니라 나 자신에 관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고 느꼈다”며 “내가 대상을 바라보는 태도와 영화감독으로서의 윤리에 관한 이야기가 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노동자들의 고통을 바라보는 카메라와 그 카메라를 든 사람을 영화 안에 함께 놓으면서, 이 감독은 자신이 오래 고민해 온 질문까지 작품의 일부로 담을 수 있게 됐다는 설명이다.
이어진 대화에서는 크시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의 ‘데칼로그’와 이번 작품의 관계가 다뤄졌다. 이 감독은 시나리오를 쓰던 중 ‘데칼로그’의 각 에피소드를 장편영화로 만드는 프로젝트에서 참여 제안을 받았다고 밝혔다.
평소 키에슬로프스키 감독과 ‘데칼로그’를 좋아했던 그는 참여를 원했고, 십계명 가운데 열 번째 계명인 ‘남의 것을 탐내지 말라’를 선택했다. 이 계명이 자신이 쓰고 있던 이야기와 깊이 연결돼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이 감독은 살인이나 도둑질을 금하는 계명이 행위에 관한 것이라면, ‘탐내지 말라’는 계명은 인간의 마음과 욕망을 향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우리가 살아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다른 사람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간다”며 “남의 것을 탐내지 말라는 계명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 가능한지, 오늘날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관객과 함께 생각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영화에는 타인에게 속한 것을 욕망하는 여러 층위가 담겨 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이 감독은 이를 하나의 정답으로 제시하기보다, 관객과 함께 바라보고 생각할 문제로 남겨두고자 했다고 밝혔다.
네 명의 주연 배우 설경구, 전도연, 조인성, 조여정에 대한 질문에서는 오랜 기다림과 서로의 연기를 이끌어낸 호흡이 화제가 됐다.
이 감독은 설경구, 전도연과 오래전 작품에서 함께했으며, 10여 년 전 이번 이야기를 처음 영화로 준비할 당시부터 두 배우를 부부 역할로 염두에 두고 캐스팅했다고 밝혔다. 두 배우 역시 프로젝트를 알고 있었지만, 영화는 곧바로 제작되지 못했다.그는 두 배우가 오랫동안 기다려준 데 감사를 표했다. 프로젝트가 보류된 뒤에도 언젠가는 만들어질 수 있다는 희망을 놓지 않았다는 것이다.
“두 배우는 정말 고맙게도 오래 기다려줬다. 영화가 만들어지지 않고 프로젝트를 접어둔 것을 알면서도 언젠가는 만들게 될지 모른다는 희망을 갖고 있었다.”
새롭게 합류한 조인성에 대해서는 그가 맡은 인물이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삶을 강력하게 지배하는 ‘자본’을 상징한다고 설명했다. 이 감독은 조인성의 외모와 존재감이 그 역할에 적합했으며, 그런 인물을 표현할 배우로 그를 높이 평가했다고 말했다.
조여정에 대해서는 ‘기생충’에서 보여준 연기를 언급하며 지적이고 영리하며 성실한 배우라고 평가했다. 또 영화계에 속한 사람으로서 스스로를 돌아보는 의식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 이번 작품과 잘 맞았다고 설명했다.
네 배우가 함께 만들어낸 연기의 조화에 대해서는 감독 자신의 공보다 배우들의 몫을 강조했다. 각자의 예술적 관점과 작업 방식이 뚜렷한 스타 배우들이 한 작품에 모이면 호흡을 맞추기가 쉽지 않을 수 있지만, 이번에는 배우들 사이에서 자연스러운 조화가 생겨났다는 것이다.
이 감독은 “네 배우의 앙상블은 내가 만들어낸 것이라고 할 수 없다”며 “배우들이 서로에게서 스스로 끌어냈다. 놀라울 만큼 자연스러운 조화와 호흡을 만들어냈다”고 말했다.
대화는 다시 영화가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는 방식으로 이어졌다. 진행자는 인물이 솔직한 감정을 드러내는 순간, 누군가 그 장면을 계속 촬영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감정의 진정성과 카메라의 개입이 충돌하는 대목을 짚었다.
이 감독은 영화 속 다큐멘터리 감독이 자신의 정체성에 가장 가까운 인물이라고 밝혔다. 자신은 극영화를 만드는 감독이지만, 그 인물이 품고 있는 문제는 다큐멘터리에만 한정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누군가 카메라를 들면 권력이 주어진다. 그 순간 권력 관계가 만들어진다고 생각한다.”
이 감독은 카메라 앞에서 극적인 사건이나 고통스러운 상황이 벌어질 때, 카메라는 그 장면에서 쉽게 시선을 돌리지 못한다고 설명했다. 고통에 더 가까이 다가가 촬영할 것인지, 아니면 카메라를 돌릴 것인지의 선택은 영화인에게 계속 남는 윤리적 문제라는 것이다.
그는 소수자나 전쟁·폭력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극영화 역시 같은 질문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말했다. 이들의 삶을 전하려는 작업이 때로는 당사자를 이용하거나 착취하고, 고통을 영화 제작을 위해 소비하는 행위로 이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타인의 고통을 다루는 이야기를 만들지만, 그들을 이용하거나 심지어 착취하고, 영화 만들기를 위해 소비하는 경우도 많다.”
이 감독은 바닷가 장면을 예로 들어 이러한 문제를 설명했다. 남편이 바다에서 몸을 돌려 어두운 공간으로 들어가 억눌러왔던 감정을 터뜨리는 순간, 아내는 그 모습을 지켜보지만 쉽게 다가가 위로하지 못한다. 상대가 드러내는 고통과 무방비한 내면이 너무 커서, 바라보는 일 자체도 두렵게 느껴지는 순간이라는 설명이다.
반면 다큐멘터리 감독은 그 상황을 카메라에 담는다. 이 감독은 이 장면을 통해 촬영자의 윤리뿐 아니라, 타인의 고통을 지켜보는 관객 자신의 시선도 돌아보게 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그는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거나 목격할 때 우리의 시선이 때로 얼마나 폭력적일 수 있는지 관객이 함께 생각하고 느끼기를 바랐다”고 말했다.
영화 속 다큐멘터리 감독이 ‘이 감독’으로 불리는 설정 역시 이러한 자기 성찰과 연결돼 있었다. 진행자가 그 호칭과 이창동 감독 자신의 관계를 짚자, 이 감독은 의도적으로 넣은 연결이라고 답했다.
그는 한국에서는 특히 영화 현장에서 이름보다 ‘감독님’이라는 호칭을 쓰는 경우가 많고, 자신도 현장에서 ‘이 감독’으로 불린다고 설명했다. 영화 속 감독과 자신 사이의 정체성이 맞닿아 있음을 그 호칭을 통해 드러내고자 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대화는 영화 속 주요 공간인 바닷가 가족 별장으로 옮겨갔다. 진행자는 집 안에 들어서는 순간 여러 세대의 역사와 인물들의 배경이 겹겹이 드러난다며, 그 공간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물었다.
이 감독은 극 중 서해안에 있는 것으로 설정된 별장을 실제로는 한국 남해안에 세트로 지었다고 밝혔다. 기존 건물을 활용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새로 만든 공간이었다.
그는 오래된 집의 분위기와 축적된 역사를 표현해야 했으며, 안에 놓인 물건과 장식 역시 한국 사회의 과거를 반영해야 했다고 설명했다. 인물들의 현재 삶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들이 누리는 부가 어디에서 비롯됐는지 암시하는 공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대표적인 소품은 할아버지의 물건으로 등장하는 호루라기였다. 이 감독은 등장인물이 이를 일부러 일본어 명칭으로 부르는 장면을 넣었다고 밝혔다. 할아버지가 일제강점기 경찰이었다는 사실을 암시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그는 그 집안의 부가 여러 세대에 걸쳐 축적됐으며, 그 출발점에는 일제강점기 일본에 협력한 역사가 있다는 점을 은근히 드러내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이를 노골적으로 제시하기보다, 공간과 사물 안에 흔적으로 남기고자 했다는 것이다.
이날 이 감독이 풀어놓은 제작 이야기는 ‘가능한 사랑’이 정리해고와 계급의 격차를 다루면서도, 그 고통을 바라보는 사람의 욕망과 책임까지 묻는 작품임을 보여줬다. 노동자의 삶에서 시작된 질문은 카메라를 든 영화감독 자신에게 돌아왔고, 다시 스크린을 바라보는 관객의 시선으로 이어졌다.
글=레이 강 기자 / ray.kang@baynewslab.com
사진=최정현 기자 / choi@baynewsla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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