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말러 교향곡 9번 지휘가 생애 마지막 무대
세계적인 지휘자이자 샌프란시스코 심포니의 전 음악감독인 헤르베르트 블롬스테트가 지난 11월 4일 별세했다. 향년 99세. 블롬스테트는 스웨덴 예테보리 자택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온하게 세상을 떠났다. 70년 넘게 세계 클래식 음악계를 이끌어온 거장의 별세 소식에 샌프란시스코를 비롯한 세계 음악계가 애도하고 있다.
블롬스테트는 1985년부터 1995년까지 10년 동안 샌프란시스코 심포니 음악감독을 맡아 오케스트라의 음악적 수준과 국제적 위상을 크게 끌어올린 인물이다. 음악감독에서 물러난 뒤에도 명예지휘자로 활동하며 샌프란시스코 심포니와 40년 넘는 인연을 이어왔다.
1927년 7월 11일 매사추세츠주 스프링필드에서 스웨덴계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블롬스테트는 어린 시절 스웨덴과 핀란드에서 성장했다. 스톡홀름과 웁살라에서 음악을 공부했으며, 미국 줄리아드 음악원과 탱글우드 음악센터에서도 지휘를 배웠다. 특히 레너드 번스타인에게 수학하며 지휘자로서의 역량을 키웠다.
1954년 스톡홀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그는 노르웨이 오슬로 필하모닉, 덴마크 방송교향악단, 스웨덴 방송교향악단 등을 이끌었다. 1975년부터 1985년까지 독일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 수석지휘자를 맡으며 유럽 정상급 지휘자로 명성을 확립했다.
샌프란시스코와의 인연은 1984년 2월 객원지휘자로 처음 무대에 오르면서 시작됐다. 당시 미국 음악계에서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던 블롬스테트는 뛰어난 음악적 해석과 치밀한 지휘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샌프란시스코 심포니는 첫 공연 한 달 만에 그를 차기 음악감독으로 선임했다.
1985년 음악감독에 취임한 그는 철저한 리허설과 악보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오케스트라의 연주력을 발전시켰다. 취임 후 5년 이내에 샌프란시스코 심포니를 이끌고 15년 만의 유럽 순회공연에 나섰으며, 잘츠부르크와 에든버러, 루체른 등 세계적인 음악 축제에서 호평을 받았다.
음반 작업에서도 중요한 성과를 남겼다. 블롬스테트는 샌프란시스코 심포니와 함께 시벨리우스와 닐센의 교향곡 전곡을 녹음해 높은 평가를 받았다. 칼 오르프의 ‘카르미나 부라나‘와 브람스의 ‘독일 레퀴엠‘ 녹음으로 그래미상을 수상하며 오케스트라의 국제적 명성을 높였다.
1995년 음악감독직에서 물러난 뒤에는 명예지휘자로 추대됐다. 이후 독일 함부르크 북독일방송교향악단과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를 이끌며 활동을 이어갔다. 특히 베토벤과 브루크너의 교향곡 해석에서 독보적인 권위를 인정받았다.
90대 후반까지 지휘봉을 놓지 않았던 블롬스테트의 마지막 무대 역시 샌프란시스코였다. 지난 5월 15일 샌프란시스코 데이비스 심포니 홀에서 열린 샌프란시스코 심포니 공연에서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9번을 지휘했다.
당시 98세였던 그는 휠체어를 타고 무대에 올랐으며, 연주 도중 건강 문제로 3악장이 일시 중단되는 상황도 있었다. 이후 예정된 공연에는 다른 지휘자가 대신 나섰고, 블롬스테트는 건강 악화로 남은 일정을 취소했다. 결국 이날 공연은 그의 72년에 걸친 지휘 경력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무대가 됐다.
말러의 교향곡 9번은 작곡가가 생전에 완성한 마지막 교향곡으로, 삶과 죽음, 이별과 초월을 담아낸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블롬스테트가 자신의 음악 인생 마지막 무대에서 이 작품을 지휘했다는 사실은 그의 별세와 함께 더욱 특별한 의미를 남기고 있다.
그는 화려한 몸짓이나 과장된 표현보다 작품의 구조와 작곡가의 의도를 충실하게 전달하는 지휘자로 유명했다. 겸손하고 절제된 태도, 치밀한 악보 분석, 오케스트라 단원들과의 깊은 음악적 교감은 블롬스테트의 지휘를 특징짓는 요소였다.
샌프란시스코 심포니는 4일 공식 추모 글을 통해 블롬스테트가 지역 오케스트라였던 악단을 국제적인 명성을 지닌 연주단체로 성장시켰다고 평가했다. 또한 그가 오늘날의 샌프란시스코 심포니를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그의 기억만으로도 음악가들에게 영감을 준다고 추모했다.
샌프란시스코 심포니는 블롬스테트의 음악적 유산을 기리기 위해 2027년 1월 14일부터 16일까지 엘림 찬이 지휘하는 공연을 고인에게 헌정할 예정이다.
생애 마지막까지 음악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았던 블롬스테트는 2027년 7월 100세 생일까지 지휘 활동을 이어가기를 희망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최근 건강이 악화되면서 그 꿈을 이루지는 못했다.
블롬스테트는 아내 발트라우트 페테르센과 1955년 결혼했으며, 아내는 2003년 먼저 세상을 떠났다. 유족으로는 네 딸과 일곱 명의 손주가 있다.
70년 넘게 세계 주요 오케스트라를 이끌며 클래식 음악의 깊이와 가치를 전해온 블롬스테트의 유산은 수많은 음반과 연주 기록, 그리고 그와 함께한 음악가들의 기억 속에 남게 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