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리뷰] 아시아미술관 하종현 회고전…삼베를 뚫고 나온 물감, 고요 속에 남은 몸의 힘

RM 소장품전과 나란히, 샌프란시스코서 한국 현대미술 조명
초기 기하학 회화부터 ‘접합’까지, 60여 년 실험의 궤적
거친 삼베에 새긴 몸의 힘…아시아미술관서 내년 1월까지
샌프란시스코 아시아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한국 현대미술 거장 하종현 회고전 전시장 모습.

최근 샌프란시스코에서 한국 현대미술을 입체적으로 조명할 수 있는 전시가 나란히 열리고 있다.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의 방탄소년단 RM 소장품 전시와 아시아미술관의 하종현 화백 북미 첫 대규모 회고전이다. 한 수집가의 시선과 한국 현대미술 거장의 60여 년 화업을 함께 살펴볼 수 있는 기회다.

그 가운데 하종현의 그림 앞에서는 몇 걸음의 거리가 중요해진다. 멀리서 하나의 색과 질서로 다가오던 화면이 가까이에서는 물감의 두께와 삼베의 틈, 긁히고 밀린 자국으로 갈라진다. 눈은 색을 따라가다가 어느새 표면에 머문다. 고요해 보였던 그림 속에서 손과 몸이 움직인 흔적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샌프란시스코 아시아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하종현 회고전’은 이러한 시선의 변화를 따라 읽을 만한 전시다. 지난 9월 25일 개막한 이번 전시는 작가의 북미 첫 대규모 미술관 회고전으로, 1960년대 초기작부터 최근작까지 50여 점을 통해 60여 년의 작업을 조망한다. 김선정 아트선재센터 예술감독이 초청 기획자로 참여했다.

샌프란시스코 아시아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한국 현대미술 거장 하종현 회고전 전시장 모습.

초기작을 살피는 공간에서는 선명한 색면의 회화와 거친 재료를 드러낸 실험적 작업이 함께 시선을 붙든다. 하종현의 삼베와 절제된 색채에 익숙한 관람자라면, 이 다채로운 출발 앞에서 작가의 이름을 새롭게 읽게 된다. 색과 형태, 재료를 바꾸어가며 회화의 조건을 탐색해 온 과정이 이곳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1967년작 ‘도시계획백서’는 그 탐색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작품이다. 선명한 기하학적 색면이 펼쳐지고, 화면 아래쪽에는 가로 방향의 굴곡이 이어진다. 

그려진 형태와 실제 표면의 주름이 겹치면서, 눈은 색면을 읽는 동시에 화면의 높낮이를 따라가게 된다. 회화를 바라보는 일이 표면의 구조를 살피는 일로 넓어진다.

철조망과 용수철 같은 재료를 동원한 실험에서는 팽팽한 긴장이 전해진다. 일상의 물건이 작품 안으로 들어오면서 재료가 지닌 무게와 거칠음도 함께 드러난다. 

특히 철조망은 한국의 분단과 전후의 불안을 연상시킨다. 이러한 작업을 거쳐 ‘접합’을 바라보면, 물감과 바탕이 맞서는 관계에도 더 예민하게 눈길이 간다.

샌프란시스코 아시아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한국 현대미술 거장 하종현 회고전 전시장 모습.

1935년 태어나 식민지 시기와 한국전쟁을 겪은 작가에게 재료는 당대의 삶과 이어져 있었다. 전후 구호물자를 담았던 포대에 쓰인 거친 천은 그의 회화를 이해하는 중요한 배경이다. 

삼베의 성긴 조직과 소박한 색은 화면의 바탕을 이루며, 물감이 지나고 머무는 자리를 결정하는 데 참여한다.

전시의 중심을 이루는 ‘접합’ 연작은 1974년 시작됐다. 하종현은 삼베 뒤쪽에서 두꺼운 유화 물감을 밀어 넣어, 천의 성긴 틈을 통과한 물감이 앞면으로 나오게 하는 배압법을 발전시켰다. 

앞면에 나타난 물감을 쓸고 밀고 긁는 행위가 더해지면서 화면에는 압력과 저항의 흔적이 남는다. 이 방식을 알고 다시 작품을 보면 물감의 자국이 다르게 다가온다. 작은 돌기와 눌린 면, 길게 끌린 흔적마다 물감의 점도와 천의 조직, 손이 가한 힘이 함께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화면을 채우는 반복은 촘촘하지만, 각각의 자국은 조금씩 다르다. 그 미세한 차이가 시선을 붙잡는다.

샌프란시스코 아시아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한국 현대미술 거장 하종현 회고전 전시장 모습.

흰색 계열의 화면에서는 특히 물감의 두께와 방향이 도드라진다. 빛을 받는 돌출부와 그 곁의 작은 그늘 사이에서 같은 색도 여러 층으로 나뉜다. 평평한 그림을 보고 있으면서도 낮은 부조를 살피는 듯한 감각이 생긴다. 작품 앞에서 필요한 시간은 그 차이를 발견하는 만큼 길어진다.

2025년작 ‘접합 25-19’에서는 푸른색과 흰색이 만들어내는 밀도의 변화가 눈길을 끈다. 위쪽에 촘촘히 모인 푸른 자국은 아래로 내려갈수록 흰색 사이로 흩어진다. 멀리서는 색이 서서히 옅어지는 흐름이 보이고, 가까이에서는 짧고 두꺼운 물감 자국 하나하나가 살아난다. 전체의 인상과 개별 흔적을 번갈아 보는 재미가 크다.

‘이후 접합’ 연작으로 시선을 옮기면 화면의 구조를 향한 관심이 한층 분명해진다. 천을 씌운 나무 막대를 활용하고 그 사이로 물감이 나오게 한 작업은 틈과 간격 자체를 회화의 요소로 끌어들인다. 

거울을 사용한 작업에서는 주변 공간과 관람자의 모습까지 화면의 일부로 들어올 수 있다. 초기작에서 시작된 표면에 대한 질문이 여기에서도 이어진다.

샌프란시스코 아시아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한국 현대미술 거장 하종현 회고전 전시장 모습.

이번 회고전의 설득력은 이러한 작업들을 함께 보게 하는 데 있다. 초기 기하학 회화의 색과 굴곡, 비전통적 재료를 사용한 실험, ‘접합’의 두꺼운 표면, 최근작의 색채를 거치며 작가가 붙들어 온 문제가 선명해진다. 무엇을 바탕으로 삼고, 물감을 어떻게 움직이며, 그 결과를 어떤 화면으로 남길 것인가 하는 문제다.

반복되는 자국을 오래 바라볼수록 작품마다 다른 힘의 배분도 읽힌다. 어떤 화면에서는 물감이 촘촘하게 모여 묵직한 덩어리로 다가오고, 다른 화면에서는 바탕의 틈과 여백이 시선을 이끈다. 비슷한 행위가 이어지는 가운데 밀도와 리듬이 달라진다. 연작을 함께 보는 의미는 그 차이에서 생겨난다.

하종현의 회화는 보는 사람에게도 시간을 요구한다. 한 걸음 가까이 다가서고, 다시 물러나 전체를 살피는 사이에 처음에는 놓쳤던 자국이 눈에 들어온다. 고요한 화면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 안에 축적된 몸의 힘도 또렷해진다.

‘하종현 회고전’은 2027년 1월 25일까지 샌프란시스코 아시아미술관 양 야마자키 파빌리온에서 열린다.

샌프란시스코 아시아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한국 현대미술 거장 하종현 회고전 전시장 모습.


글·사진=최정현 기자 / choi@baynewsla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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