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리뷰] RM의 취향을 따라 걷다…SFMOMA에서 만난 ‘너와 나 사이’

김환기의 푸른 점에서 윤형근의 짙은 엄버까지
한국 근현대미술 180여 점으로 이어낸 기억과 경계의 여정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SFMOMA)에서 열리고 있는 'RM x SFMOMA: Between You and Me' 전시 입구. BTS의 RM이 공동 큐레이터로 참여했다.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SFMOMA)에서 열리는 ‘RM x SFMOMA: Between You and Me’를 따라가다 보면, 이 전시가 단순히 BTS RM의 개인 컬렉션을 공개하는 자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비교적 빨리 깨닫게 된다.

물론 출발점은 RM이다. 그가 어떤 작품을 수집했고 어떤 작가를 좋아하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관람객을 전시장 안으로 끌어들인다. 그러나 전시가 시작되고 몇 작품을 지나면 관심의 중심은 컬렉터 RM에서 김환기와 윤형근, 장욱진과 박래현, 권옥연과 이응노, 백남준 등 작품을 만든 작가들에게 자연스럽게 이동한다.

10월 3일부터 2027년 2월 7일까지 이어지는 이번 전시는 RM의 개인 소장품이 미술관에서 처음 공개되는 전시다. RM의 컬렉션과 SFMOMA 소장품에서 선별한 한국 및 해외 작가들의 작품 약 180점이 전시장에 나왔다. 미국에서 이번 전시를 볼 수 있는 곳도 SFMOMA가 유일하다.

이번 전시가 더욱 주목되는 이유는 미국에서는 한 자리에서 쉽게 접하기 어려운 한국 근현대미술을 대규모로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김환기와 윤형근을 비롯해 장욱진, 박래현, 권옥연, 이응노, 김창열, 유영국, 정상화, 김윤신, 이신자, 손상기 등 서로 다른 시대와 흐름을 대표하는 한국 작가들이 해외 현대미술의 주요 작가들과 같은 공간에서 마주한다.

한국 미술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전시가 아닌 일반적인 미국 현대미술관의 전시에서 이처럼 여러 세대의 한국 작가를 한꺼번에 접하는 기회는 흔치 않다. 그런 점에서 ‘RM x SFMOMA’는 RM의 팬들에게 그의 미술 취향을 보여주는 것을 넘어, 한국 근현대미술을 처음 접하는 미국과 해외 관람객들에게 한국 작가들의 조형 언어와 작품 세계를 소개하는 통로로 기능할 가능성이 크다.

김환기의 1970년작 ‘26-I-70 #141’이 맞이하는 '블루 워터' 섹션.

특히 작품들이 ‘한국미술’이라는 별도의 범주 안에 고립되지 않고 마크 로스코, 도널드 저드, 이브 클랭, 아그네스 마틴, 조지아 오키프 등 SFMOMA의 주요 소장품과 직접 나란히 놓인다는 점이 의미 있다. 한국 작가들을 서구 미술사의 주변부에서 설명하는 대신 같은 질문과 같은 벽면 위에서 직접 비교하게 만든다. SFMOMA 역시 이번 전시를 RM의 컬렉션과 미술관 소장품이 대화를 나누듯 배치해 자연, 기억, 인간 존재 같은 보편적인 주제를 서로 다른 작가들이 어떻게 다뤄왔는지 보여주는 전시라고 설명한다.

전시의 전체 인상을 한마디로 설명한다면 ‘개인의 취향이 하나의 미술 언어가 되는 과정’에 가깝다. 미술사적 연대나 국적, 장르에 따라 작품을 줄 세우지 않는다. 대신 파랑, 물, 친구, 집, 사람, 고통, 설명하기 어려운 취향 같은 매우 개인적인 단어들을 따라 작품들이 모인다.

RM은 전시 서문에서 자신을 서울과 샌프란시스코, 무대 위와 무대 아래, 그림 앞에 선 자신과 그림 뒤에 존재하는 사람 사이에 있는 존재라고 설명한다. 해외를 다니면서 낯선 것들을 만날수록 오히려 자신이 자란 한국의 시간과 감각이 더 또렷해졌고, 그렇게 뒤늦게 한국 작가들을 찾아보기 시작하면서 컬렉션이 400점을 넘어섰다고 말한다.

이 말은 전시 전체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다. ‘너와 나 사이’의 ‘사이’는 단순히 두 사람의 거리가 아니다. 한국과 미국, 과거와 현재, 개인과 보편, 전통과 현대 사이에서 작품들이 서로를 바라보는 공간이다.

'블루 워터' 섹션을 둘러보고 있는 관람객들.

▶︎ ‘블루 워터’…김환기의 파랑에서 시작된 여정

전시는 ‘블루 워터’에서 시작한다. 첫 작품부터 상징적이다. SFMOMA 소장 김환기의 1970년작 ‘26-I-70 #141’이 관람객을 맞는다. 수많은 푸른 점으로 이루어진 화면은 멀리서 보면 하나의 공간처럼 보이고, 가까이 다가가면 각 점이 천에 스며들어간 흔적이 드러난다.

RM은 이 작품을 전시의 출발점으로 처음부터 생각했다고 밝혔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 가운데 한 명이 김환기였고, SFMOMA 역시 김환기의 중요한 작품을 소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환기 사후 부인 김향안의 노력으로 이 작품은 1979년 SFMOMA에 기증됐다.

이 작품 앞에 서면 이번 전시가 단순히 ‘RM이 좋아하는 그림’의 집합이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김환기에게 푸른 점은 뉴욕에서 서울을 떠올리는 행위였다. RM의 작품 설명에는 김환기가 당시 서울을 생각하며 점을 찍었다는 기록이 소개된다. RM 역시 그림의 점을 세어보다 어느 순간 자신의 생각 속으로 빠져들었다고 한다.

김환기의 파랑 옆에서는 이브 클랭의 파랑이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 김환기가 수많은 점과 시간을 축적해 파랑을 만들었다면, 클랭은 안료를 흡수한 스펀지를 작품으로 전환했다. 같은 색이지만 하나는 반복된 행위의 시간이고 다른 하나는 물질이 색을 흡수하는 순간이다.

로니 혼의 유리 작품 앞에서는 물질 자체에 대한 감각이 흔들린다. 처음 보면 물처럼 보이고, 조금 더 바라보면 얼음이나 빙하처럼 보인다. RM 역시 처음 이 작품을 보았을 때 실제 물이 고인 것으로 착각했다고 설명한다. ‘물→유리→얼음’으로 계속 바뀌어 보이는 과정에서 관람객은 자신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다시 확인하게 된다.

김창열의 ‘물방울’에서는 실제 물이 없는 화면에서 오히려 물의 존재가 가장 강하게 느껴진다. RM은 화면 속 물방울의 배치를 한반도처럼 보고 아래쪽 외로운 한 방울을 제주도라고 상상한다. 작가가 처음부터 그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더라도 관람자는 자신의 기억을 작품에 덧붙인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번 전시의 관람법이 드러난다. 작품을 정확하게 해석해야 한다는 압박보다 ‘나는 무엇을 보았는가’가 먼저 온다.

'블루 워터'에 이어 마련딘 '프렌드스케이프' 섹션.

▶︎ ‘프렌드스케이프’…동물과 풍경을 친구로 바라보다

두 번째 ‘프렌드스케이프’로 이동하면 분위기가 한층 부드러워진다. 친구와 풍경을 합친 제목처럼 산, 나무, 물, 동물이 하나의 방 안에서 만난다. RM은 풍경 역시 자신에게 친구와 같은 존재였고 어떤 산은 기억을 불러오고 어떤 바다는 그저 곁에 머물렀다고 설명한다.

이 공간에서 특히 인상적인 것은 조선시대 목조 오리인 ‘목안’을 바라보는 방식이다. 결혼하는 부부에게 안녕과 화합을 기원하며 선물하던 생활 속 물건을 전시장에서는 가짜 연못과 함께 보여준다.

전통 유물을 유리 진열장 속에서 과거의 대상으로만 보여주는 방식과는 거리가 있다. RM에게 목안은 집을 지키거나 자신을 맞아주는 친근한 존재다. 그는 각각의 목안이 사람처럼 모두 다르게 생겼다고 말한다. 전통 공예품을 현재의 생활 속 친구처럼 받아들이는 시선이다.

한국과 미국의 호랑이를 한 공간에서 만나는 것도 재미있다. 이원찬과 웨인 티보가 각각 만든 호랑이를 놓고 ‘동양과 서양’이라는 거창한 비교를 하기보다, 같은 동물을 전혀 다른 시대와 재료로 만들었을 때 발생하는 충돌 자체를 보여준다.

장욱진 화백의 작품이 나란히 전시된 '홈' 섹션.

▶︎ ‘홈’…미술품을 소유하는 것과 함께 사는 것의 차이

‘홈’에서는 전시가 좀 더 사적인 영역으로 들어간다.

이 방은 RM의 집을 그대로 옮겨놓은 공간은 아니다. 그가 말하는 ‘홈’은 작품과 함께 생활하는 감각이다. 집에서 매일 작품을 바라보고 때로는 작품이 자신을 바라보는 것처럼 느끼는 경험이다. 그는 좋아하는 작가들의 ‘살아 있는 존재감’을 곁에 두고 싶어서 수집을 시작했다고 설명한다.

장욱진의 작은 그림 ‘길’을 보면 그런 감각이 쉽게 이해된다. 작은 화면 안에는 집과 나무, 길과 사람이 있다. 거대한 사건은 없다. 하지만 학교나 일을 마치고 돌아오다 집이 보이기 시작할 때 자연스럽게 빨라지는 발걸음 같은 감정이 숨어 있다.

반면 손상기의 작품은 ‘집’의 편안함을 깨뜨린다. RM은 손상기가 부유한 집의 거실에 자신의 작품이 걸려 있는 장면을 그린 ‘아이러니’를 실제 자신의 거실에 걸어두었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그 그림을 보면서 자신 역시 성공과 안락함에 익숙해져가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에게 질문하게 됐다고 말한다.

이 대목에서 컬렉션의 성격도 드러난다. 작품은 자산이나 장식품이 아니라 자신을 불편하게 만드는 장치가 된다.

필립 거스턴 역시 그런 역할을 한다. 추상표현주의에서 성공을 거둔 뒤 자신이 구축한 화풍을 버리고 거칠고 만화적인 구상회화로 돌아선 작가다. RM은 거스턴을 보면서 자신도 언젠가 익숙한 세계를 포기할 수 있을지를 묻는다.

결국 ‘홈’은 편안함을 보여주는 방이면서 동시에 가장 긴장된 공간 가운데 하나다. 집은 자신을 보호하지만, 그 안의 예술은 계속해서 그 보호막을 흔든다.

권진규의 작품이 관객들을 먼저 맞이하는 '포토 붓다' 섹션.
백남준 작 ‘압축된 깨달음.

▶︎ ‘포토 붓다’…화면 속 자신을 바라보는 시대

다음 ‘포토 붓다’에서는 긴장이 유머로 전환된다.

백남준의 ‘압축된 깨달음’ 앞에는 작은 부처와 TV, 카메라가 놓인다. 부처는 자신을 찍고 있는 카메라의 영상을 TV 화면으로 바라본다.

1970년대부터 백남준이 발전시킨 ‘TV 부처’의 구조를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놀랄 만큼 익숙하다. 우리는 매일 자신의 모습을 휴대전화로 찍고, 화면 속 자신을 다시 확인하고, 다른 사람에게 전송한다.

그러나 작품 속 부처는 화면 속 자신을 보면서도 움직이지 않는다.

RM 역시 바로 그 차이에 주목한다. 반세기 뒤 우리 모두가 화면 속 자신을 바라보는 존재가 됐지만 부처처럼 고요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관람객에게 사진을 찍어도 좋다고 권하는 것도 재미있다. 작품을 찍으려 휴대전화를 드는 순간 관람객 자신이 ‘보는 사람과 보이는 사람’이 반복되는 백남준의 구조에 들어간다.

권진규의 나무 ‘부처’가 함께 놓이면서 시선은 한 번 더 뒤집힌다. 백남준의 부처가 자기 자신을 보고 있다면 권진규의 부처는 오히려 우리를 바라보는 듯하다. 관람객이 작품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작품이 관람객을 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응노의 '군상'이 전시된 '피플' 섹션.

▶︎ ‘피플’…얼굴을 보며 결국 자신의 이야기를 찾다

‘피플’에서는 그 질문이 인간의 얼굴로 이동한다.

RM은 무대 위에서 항상 수많은 시선의 대상이 되는 ‘얼굴’이지만 미술관에 들어오면 자신이 다른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는 사람이 된다고 말한다.

한영수의 ‘서울 정동 덕수궁’은 이 방에서 오래 시선을 붙잡는 작품이다. 한국전쟁 직후 덕수궁 돌담길에서 남녀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얼굴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어느 시대 어느 연인도 될 수 있다.

전쟁을 경험한 사진가 한영수가 폐허가 아니라 옷을 차려입은 사람, 데이트하는 연인, 노는 아이들을 계속 찍었다는 사실도 작품의 의미를 바꿔놓는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사람은 사랑하고 만나고 살아간다.

RM은 이 사진을 보며 자신의 부모 역시 젊은 시절 이런 모습이지 않았을까 생각한다고 한다. 개인의 기억이 작품으로 들어오는 순간이다.

권옥연의 여인은 또 다른 방식으로 익명적이다. 실제 모델이 없는 얼굴이다. 특정 인물을 그린 것이 아니라 작가가 평생 반복해서 만들어간 하나의 얼굴이다.

이응노의 ‘군상’에서는 아예 얼굴이 사라진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몇 번의 먹선과 몸짓으로 표현된다. 그런데 얼굴도 표정도 없는 인물들이 모이면 이상하게도 강한 생명력이 만들어진다.

‘피플’을 보고 나면 초상이 반드시 한 사람의 얼굴을 재현하는 장르일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얼굴이 없어도 사람이 보이고, 실제 사람이 없어도 얼굴이 생긴다. 작품과 관람객 사이에서 사람이 다시 만들어진다.

'패션' 섹션 작품들을 둘러보고 있는 관객들.
박래현의 '작품'. 패션 섹션에스는 단연 눈길을 끄는 작품이다.

▶︎ ‘패션’…열정이라는 말 뒤에 놓인 삶의 무게

전시의 정서가 가장 깊어지는 곳은 ‘패션’이다.

여기에서 ‘패션’은 단순한 열정을 의미하지 않는다. RM은 이 단어를 ‘고통’에 가까운 의미로 받아들인다. 자신의 세계를 오랫동안 포기하지 않고 밀고 나간 작가들이 이 방에 모인다.

박래현의 1963년작 ‘작품’은 그중에서도 눈길을 끈다. 먹과 채색이라는 전통 동양화 재료를 사용했지만 화면은 이미 추상으로 이동하고 있다.

그러나 작품보다 더 오래 남는 것은 그 작품을 만든 시간에 관한 이야기다. 박래현은 네 아이의 어머니였고 청각장애가 있던 남편 김기창의 통역 역할까지 맡았다. 화가가 될 수 있는 시간은 가족이 잠든 뒤였다.

그 사실을 알고 다시 작품을 보면 화면의 한 획이 단순한 조형 요소로만 보이지 않는다.

이성자의 ‘바람은 증언한다’ 역시 비슷하다. 전쟁 중 한국에 세 아들을 남겨두고 파리로 떠나야 했던 이성자는 붓질 한 번을 아이들에게 밥 한 술을 떠먹이는 행위처럼 생각하며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그러면 화면 위 반복되는 점은 추상이 아니라 수천 번의 끼니가 된다.

이 방의 작품들을 보고 있으면 ‘열정’이라는 말이 얼마나 가볍게 소비돼 왔는지도 생각하게 된다. 여기에서 열정은 좋아하는 일을 신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생활과 고통, 실패와 외로움 속에서도 다시 작업대로 돌아오는 행위에 가깝다.

말로는 설명이 안되는데 좋은, 취향에는 이유가 없다는 작품들을 모아놓은 섹션.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냥 좋다’…취향에는 반드시 설명이 필요한가

그 무거움이 계속 이어질 것 같지만 다음 방에서 전시는 뜻밖에 긴장을 풀어버린다.

제목은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냥 좋다’.

RM은 작품을 왜 좋아하는지, 왜 샀는지를 설명해달라는 질문을 많이 받았고 그때마다 미술사적 언어로 설명해야 할 것 같은 압박을 느꼈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자신은 ‘진지한 애호가’일 뿐이고, 어떤 작품은 이유 없이 그냥 좋아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이 방은 이번 전시 전체를 이해하는 또 하나의 열쇠다.

미술을 좋아하는 데 반드시 논리적인 이유가 있어야 할까.

요시토모 나라의 도자기를 보며 RM은 조선 철화백자를 떠올린다. 작품을 집에 가져와 실제 철화백자 옆에 놓으면서 생기는 어색한 조합을 즐겼고, 작가가 한국 전시 오프닝에서 종이컵에 막걸리를 마시던 기억까지 작품에 겹쳐진다.

미술사의 의미와 개인적 기억 중 무엇이 더 중요한가를 따지는 것은 이 전시에서는 큰 의미가 없다. 둘 다 작품의 일부가 된다.

이번 전시의 중심축이 되는 '엄버' 섹션.

▶︎이번 전시의 중심축, 윤형근

그리고 전시는 마침내 ‘엄버’에 도착한다.

이번 전시에서 특히 눈여겨봐야 할 지점은 윤형근이다. RM이 오랫동안 각별한 관심을 보여온 작가인 만큼 마지막 두 공간이 사실상 윤형근을 위한 집중 전시처럼 구성돼 있다.

전시장에는 1973년 ‘검은 바탕의 파랑’부터 여러 시기의 ‘청다색’, ‘무제’ 등 윤형근의 작품이 다수 배치돼 있다. 한두 점을 대표작처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1970년대부터 1990년대, 2000년대로 이어지는 작품을 통해 윤형근의 색과 화면이 변화해 가는 과정을 따라볼 수 있다는 점은 이번 전시의 가장 큰 특징 가운데 하나다. 실제 작품 목록에는 1973년작 ‘검은 바탕의 파랑’, 1978년과 1991년의 ‘청다색’, 1986~90년의 ‘무제’ 등 RM 소장 윤형근 작품들이 연이어 포함돼 있다.

미국 관람객에게도 이 부분은 상당히 의미가 있다. 윤형근이라는 이름을 이미 알고 있더라도 그의 작품을 서로 다른 시기별로 비교하면서 한 공간에서 집중적으로 볼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다. 더구나 도널드 저드와 마크 로스코, 추사 김정희, 이사무 노구치까지 함께 배치해 윤형근의 작품 세계를 한국 근현대사와 서예, 미니멀리즘, 색면회화라는 여러 맥락 속에서 입체적으로 바라보게 한다.

RM은 2019년 베니스에서 윤형근의 작품을 보았던 경험이 자신의 미적 감각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말한다. 그때 느낀 것은 압도감이었지만 사람을 짓누르는 압도가 아니라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드는 힘이었다고 설명한다.

그의 설명을 들은 뒤 윤형근의 여러 작품을 차례로 보면 왜 RM이 이 작가에게 그토록 매료됐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 초기 화면에서는 블루가 아직 분명히 남아 있고, 시간이 흐를수록 엄버와 뒤섞이며 점차 검정에 가까운 깊은 색으로 가라앉는다. 화면의 구조 역시 갈수록 단순해진다.

윤형근의 색은 블루와 엄버다.

블루는 하늘, 엄버는 땅이다.

윤형근은 김환기의 제자이자 사위였다. 전시 처음 김환기의 파랑에서 시작된 색이 마지막 윤형근의 화면에서 땅의 색과 만나 점점 짙어진다.

1979년 ‘청다색 ’79-C6’에서는 두 개의 어두운 기둥 사이에 밝은 공간이 열린다. 윤형근이 ‘천지문’이라 불렀던 구도다. 하늘과 땅이 만나는 문이다.

물감은 표면에 멈추지 않는다. 천 속으로 스며든다. 붓이 멈춰도 색은 조금 더 나아간다.

그 모습은 이번 전시의 구조와도 닮아 있다. 사람과 사람, 시대와 시대 사이에 분명한 경계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서로의 영역으로 조금씩 스며든다.

이번 전시의 한 축을 이루는 윤형근의 작품을 만날 수 있는 ‘엄버’ 섹션. 윤형근의 작품은 마크 로스코의 작품과 나란히 전시돼 있다. 마치 한국 작가들의 작품도 세계 미술사의 거장들과 당당히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마지막 방에서 도널드 저드와 마크 로스코가 윤형근과 만나는 장면은 이번 전시에서 가장 강한 큐레이션 가운데 하나다.

윤형근은 해외에서 종종 ‘한국의 로스코’라는 이름으로 소개돼 왔다. RM은 그 표현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히려 로스코와 윤형근을 나란히 놓고 직접 비교해보라고 한다.

실제로 두 작품을 바라보면 차이가 선명해진다. 로스코의 색은 화면 위에서 떠오르는 듯하다. 가장자리가 풀리며 공중으로 번진다. 반면 윤형근의 색은 천에 스며들고 아래로 가라앉는다.

RM의 작품 설명은 두 그림을 ‘공중과 땅’으로 구분한다. 비슷한 것은 어둠뿐이며 그 어둠조차 서로 다르게 작동한다.

이 비교는 의미가 크다. 한국 작가를 서구의 유명 작가를 통해 설명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두 사람을 같은 공간에 세운 뒤 차이를 보여준다. ‘한국의 누구’가 아니라 ‘윤형근은 윤형근’이라는 사실을 작품 자체로 증명하려는 방식이다.

도널드 저드와의 관계 역시 흥미롭다. 미니멀리즘을 대표하는 뉴욕 작가 저드와 격동의 한국 근현대사를 통과한 윤형근은 출발점이 전혀 다른 작가지만 1991년 서울에서 만나 서로의 작업을 알아봤다. 전시장에서는 저드의 차가운 금속 구조물과 윤형근의 깊고 스며드는 색이 마주한다. 서로 극단적으로 다른 듯 보이는 두 작가가 절제와 반복, 구조를 통해 연결되는 장면이다.

김환기의 파랑에서 출발한 전시는 윤형근의 엄버에서 끝난다. RM은 김환기가 뉴욕에서 추구했던 ‘한국적인 것의 보편화’를 윤형근이 이어갔다고 바라본다. 김환기가 하늘이라면 윤형근은 땅이다. 장인이자 스승이었던 김환기와 사위이자 제자였던 윤형근이 전시의 시작과 끝을 맡는다.

눈길을 끌었던 추사 김정희의 작품들.

전시 마지막 공간은 가장 어둡고 조용하다. 그곳까지 걸어가고 나면 이번 전시가 RM의 컬렉션 자랑이 아니라는 점은 더욱 분명해진다. 오히려 반대에 가깝다. 자신이 좋아했던 작품을 내놓고, 왜 좋아했는지 설명하고, 어떤 작품 앞에서 위로를 받았는지, 어떤 작품 때문에 부끄러웠는지, 어떤 작품이 자신을 불편하게 만들었는지를 보여준다.

그 과정에서 RM이라는 이름은 점점 뒤로 물러난다. 남는 것은 작품과 작품 사이의 관계다.

김환기의 파랑과 윤형근의 엄버, 한영수의 이름 없는 연인과 권옥연의 존재하지 않는 여인, 백남준의 화면 속 부처와 그 앞에서 휴대전화를 들어 올리는 관람객, 밤에 그림을 그린 박래현과 그 작품 앞에 서 있는 지금의 우리다.

전시 개막에 앞서 프리뷰를 찾아 작품들을 둘러보고 있는 관객들. 관객들 중에는 RM의 팬들도 많았다.

그리고 미국에서 이 전시를 바라보면 또 하나의 의미가 더해진다.

한국에서는 미술관과 주요 전시를 통해 비교적 자주 접할 수 있는 김환기, 윤형근, 박래현, 이성자, 장욱진, 이응노 등의 작품이 미국의 일반 관람객들에게는 여전히 낯설 수 있다. ‘RM x SFMOMA’는 이들을 한두 명의 유명 작가로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여러 세대와 매체, 서로 다른 삶을 가진 작가들의 작품을 한꺼번에 보여준다. SFMOMA 보도자료 역시 RM의 컬렉션이 한국 근현대미술을 중심으로 하면서 5세기부터 동시대까지 폭넓은 한국 미술의 흐름을 포괄한다고 설명한다.

세계적인 팝 아티스트 RM이라는 이름이 관람객을 전시장으로 이끌 수 있다면, 전시장을 나설 때 그들이 기억하는 이름이 김환기와 윤형근, 박래현, 장욱진, 권옥연, 이응노일 수 있다는 점에서 이번 전시는 또 다른 가치를 갖는다.

특히 미술관을 찾는 미국과 해외 예술 애호가들이 한국 작가의 작품을 로스코와 저드, 클랭과 오키프 같은 서구 미술사의 대표 작가들과 같은 눈높이에서 직접 비교하게 된다는 것은 한국 근현대미술의 독자성과 우수성을 알리는 좋은 계기가 될 수 있다. ‘한국의 로스코’라는 설명 없이도 윤형근의 작품이 얼마나 독자적인지, 서구의 추상미술과 나란히 놓였을 때 김환기의 푸른 점이 얼마나 다른 시간과 정서를 품고 있는지를 관람객 스스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전시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제목에 들어 있는 ‘사이’인지도 모른다.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니다. 두 존재가 마주보는 그 사이에서 무엇인가가 만들어진다.

SFMOMA는 이번 전시를 위해 RM이 직접 녹음한 한국어와 영어 오디오 가이드, 직접 작성한 벽면 글과 작품 설명, 직접 고른 음악까지 함께 제공한다. 하지만 그것 역시 관람객에게 하나의 정답을 주기보다는 RM이 작품을 바라본 하나의 방식을 들려주는 데 가깝다.

전시를 다 보고 나왔을 때 기억에 남는 것은 ‘RM은 이런 그림을 소장하고 있다’는 사실보다 다른 질문이다.

나는 어떤 작품 앞에서 멈추는가. 왜 그 작품이 좋은가. 그리고 그 이유를 반드시 설명할 수 있어야 하는가. ‘RM x SFMOMA: Between You and Me’는 그 질문에 답하지 않는다. 대신 김환기의 푸른 점에서 시작해 윤형근의 짙은 문까지 관람객을 데려간다. 그 사이에는 한국 근현대미술의 여러 세대가 있고, 미국에서는 쉽게 한자리에서 만나기 어려운 작가들의 삶과 작품이 있다.

RM의 이름을 따라 전시장에 들어온 관람객이 윤형근의 검은 기둥 앞에서 오래 머물고, 박래현의 그림을 다시 찾아보고, 장욱진과 이성자, 이응노라는 이름을 기억하게 된다면 이 전시는 이미 RM의 개인 컬렉션 공개 이상의 역할을 하게 된다.

그것이 ‘RM x SFMOMA’가 지닌 또 하나의 의미다. 개인의 취향에서 시작된 전시가 샌프란시스코에서 한국 근현대미술을 세계의 관람객과 연결하는 하나의 다리가 되고 있다.



글=레이 강 기자 / ray.kang@baynewslab.com
사진=최정현 기자 / choi@baynewsla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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