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용안정·인사평가 개선 요구 확산
고임금과 스톡옵션, 자유로운 기업문화를 바탕으로 노동조합과 거리를 두어왔던 실리콘밸리 기술직 근로자들 사이에서 노조 결성과 집단행동 움직임이 확산되고 있다. 인공지능(AI)의 급속한 도입과 대규모 구조조정으로 고용 불안이 커지면서,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와 제품 관리자 등 전문직 근로자들도 노동조합을 통한 고용안정과 경영 의사결정 참여를 요구하고 있다.
11일 KQED 보도에 따르면 실리콘밸리 기술직 근로자들은 AI로 인한 일자리 감소뿐 아니라 업무 방식 변화, 직원 감시 강화, 기업이 개발한 기술의 사회적 활용 문제까지 집단행동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과거 높은 급여와 개인 협상을 통해 근로조건을 개선하던 기술업계에서 노동자들의 공동 대응 필요성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
실제 구글 직원들은 지난 7월 마운틴뷰 본사에서 대규모 감원에 반대하며 고용안정 대책을 요구했다. 알파벳 노동조합 소속 직원들은 약 4,500명이 서명한 청원서를 순다르 피차이 최고경영자에게 전달하고 해고 시 퇴직금 보장, 자발적 퇴사 지원제도 마련, 인사평가 방식 개선 등을 요구했다.
특히 외국인 직원들은 해고가 단순한 실직에 그치지 않고 체류 신분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직원들은 퇴직금을 일시금 대신 일정 기간 급여 형태로 지급받을 수 있도록 해 건강보험과 이민 신분을 유지할 시간을 확보하는 방안도 제시했다.
AI 도입이 가속화되면서 기술직의 업무 환경도 달라지고 있다. 기업들이 직원들에게 AI 활용을 적극적으로 요구하는 가운데 일부 근로자들은 AI 사용 빈도를 인사평가에 반영하거나 업무 과정을 감시하는 방식에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전미통신노동조합 소속 제러미 버닉은 KQED 인터뷰에서 AI 도입이 반드시 생산성 향상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일부 업무의 효율을 떨어뜨릴 수 있다고 지적했다. 노동조합 측은 AI 사용과 관련한 근로조건을 단체교섭에서 다룰 수 있도록 지침과 협상 도구를 마련하고 있다.
실리콘밸리의 구조조정도 이러한 움직임을 부추기고 있다. 메타를 비롯한 주요 기술기업들은 AI 인프라와 데이터센터에 대한 투자를 확대하는 과정에서 기존 인력을 감축해 왔다. 다만 모든 기술업계 감원이 AI에 의한 직접적인 일자리 대체 때문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기업의 비용 절감과 조직 개편, 코로나19 기간의 과잉 채용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스탠퍼드대의 2026년 AI 관련 보고서에서는 신입 소프트웨어 개발자의 고용 감소가 주요 문제로 제기됐다. 특히 젊은 개발자들의 고용이 2024년과 비교해 약 20% 감소한 것으로 분석되면서 AI 시대에 신규 인력의 취업 기회가 줄어들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노동조합 결성을 위한 움직임은 실제 성과로도 이어지고 있다. 지난 6월 캘리포니아대학교 소속 기술직 근로자 2,000여 명이 노조 결성에 찬성했다. 이들은 임금 협상과 원격근무 유지, 해고 보호뿐 아니라 AI 기술의 업무 도입 과정에 직원들의 의견을 반영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AI가 직원들의 업무를 어떻게 바꾸는지뿐만 아니라 그 기술을 어디에 사용할 것인지도 새로운 쟁점이다. 구글 제품 관리자로 근무하는 조슈아 캐럴은 기술직 근로자 연대 조직인 테크 워커스 콜리션에 참여해 AI, 감시기술, 군사적 활용 등과 관련한 직원들의 발언권 확대를 추진하고 있다.
구글 내부에서는 연방 이민세관단속국(ICE)을 비롯한 이민단속 기관과의 기술 협력에 반대하는 움직임도 나타났다. 직원들이 주도한 캠페인에는 지난달까지 약 1,700명이 서명했으며, 알파벳 노동조합도 이를 공식 지지했다. 이들은 기업이 개발한 기술이 정부의 감시와 이민단속에 활용되는 과정에서 직원들에게도 의견을 제시할 기회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실리콘밸리에서 노동조합이 빠르게 확산될지는 여전히 불확실하다. 연방 노동통계국에 따르면 컴퓨터·수학 관련 직종의 노조 가입률은 3.7%로, 전체 근로자 평균인 약 10%보다 크게 낮다. 높은 급여와 개인별 보상체계, 직원들의 잦은 이직, 외국인 취업비자에 따른 고용 불안 등이 노조 조직화의 장애물로 꼽힌다.
실리콘밸리 노동문화를 연구해 온 역사학자 마거릿 오마라는 기술기업들이 오랫동안 스톡옵션과 개별 보상체계를 활용해 직원들과 직접 관계를 유지해 왔다고 설명했다. 기업과 직원이 공동의 성공을 추구한다는 인식이 노동조합의 필요성을 낮추는 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반면 이러한 움직임이 대규모 노조 결성으로 이어질지는 지켜봐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마운틴뷰 전 시장이자 오랜 지역 활동가인 레니 시겔은 AI에 대한 불안만으로 기술직 근로자들이 대규모 노조 조직화에 나서지는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높은 급여를 받는 전문직 근로자들이 여전히 개별 협상을 선호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캘리포니아 주정부도 AI에 따른 노동시장 변화에 대응하고 있다. 개빈 뉴섬 주지사는 지난 5월 AI가 일자리에 미치는 영향을 검토하고, 실직자 재교육과 실업보험 확대, 해고 근로자 보호 방안 등을 마련하도록 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실리콘밸리 기술직의 노조 조직화는 아직 초기 단계지만, AI 산업의 급성장과 고용 불안이 기존 기업문화를 변화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기술 개발의 중심에 있는 엔지니어와 전문직 직원들이 임금과 복지를 넘어 AI 도입 방식과 기술의 사회적 책임에까지 집단적인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면서, 향후 실리콘밸리 기업들의 노사관계에도 변화가 나타날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