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년의 ‘비슈누’에서 현대미술까지…아시아미술관, 캄보디아의 시간을 잇다

22일 프리뷰…‘비슈누의 우주 바다’ 23일부터 내년 1월까지
물과 왕권으로 읽는 앙코르…원래 길이 약 20피트의 청동 걸작
3층 고대 유물·2층 현대미술에 발리의 가루다까지 이어지는 전시
샌프란시스코 아시아미술관에서 공개된 캄보디아 국립박물관 소장 ‘웨스트 메본의 누워 있는 비슈누상’.

천 년 전 캄보디아의 거대한 저수지 한가운데에는 우주의 바다가 있었다. 인공섬에 세운 사원 안에서 힌두교의 신 비슈누가 뱀의 몸을 받침 삼아 누워 있었다. 물을 다스려 번영한 왕국은 그 물 위에 세계의 탄생을 이야기하는 신을 모셨다.

앙코르 문명의 예술과 기술, 신앙과 왕권이 응축된 이 청동 걸작이 샌프란시스코를 찾았다. 아시아미술관은 10월 23일부터 내년 1월 25일까지 오셔 재단 전시실에서 특별전 ‘비슈누의 우주 바다’를 개최한다. 캄보디아 국립박물관이 대여한 ‘웨스트 메본의 누워 있는 비슈누상’을 중심으로, 물이 한 문명의 삶과 상상력을 어떻게 지탱했는지 살펴보는 전시다.

개막을 하루 앞둔 22일 열린 미디어 프리뷰에서는 비슈누상을 앙코르의 지리와 역사 속에서 읽어내는 전시 구성이 소개됐다. 관람은 이 특별전에서 끝나지 않는다. 3층의 고대 앙코르 유물, 2층의 캄보디아 현대미술, 1층의 ‘발리의 가루다’를 함께 둘러보면 동남아시아의 신화가 지역과 시대를 건너 이어지는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전시를 기획한 나타샤 라이클레 동남아시아 미술 담당 큐레이터는 프리뷰에서 앙코르와트가 캄보디아의 수많은 사원 가운데 하나의 보석이라고 설명했다. 

이번 전시가 주목하는 것도 유명한 사원 건축의 외형만이 아니다. 사원을 둘러싼 해자와 저수지, 그 물을 움직이게 한 지형과 기술이 작품을 이해하는 중요한 실마리가 된다.

고대 앙코르의 중심지는 쿨렌산맥과 톤레사프호 사이의 평원에 자리했다. 사람들은 산에서 흘러내려 오는 물을 끌어들이고 저장한 뒤 필요한 곳으로 나누는 정교한 수리 체계를 발전시켰다. 홍수와 가뭄의 피해를 줄이는 물 관리 기술은 왕국의 부와 노동력을 뒷받침했고, 거대한 사원들을 건설할 수 있는 기반이 됐다.

샌프란시스코 아시아미술관에서 공개된 캄보디아 국립박물관 소장 ‘웨스트 메본의 누워 있는 비슈누상’ 뒷모습.

비슈누상이 놓였던 웨스트 메본 사원은 이러한 관계를 집약해 보여준다. 길이가 약 5마일, 너비가 약 1.3마일인 웨스트 바라이 저수지 한가운데 인공섬을 만들고 사원을 세웠다. 사원 내부에도 물을 채우고 중앙 기단에 비슈누상을 두었다. 

전시장에서는 저수지를 샌프란시스코 지도에 겹친 영상을 통해 그 규모를 가늠할 수 있다.

이 배치는 힌두교의 창조 신화를 현실의 공간에 옮긴 것이었다. 우주가 소멸한 뒤 모든 것이 사라지면 우주의 바다만 남고, 비슈누는 뱀 아난타의 똬리 위에 누워 깊은 명상 상태에 머문다. 이후 그의 배꼽에서 연꽃이 피어나고 그 위에 브라흐마가 나타나면서 새로운 창조의 순환이 시작된다.

물을 담은 사원에 누운 비슈누는 세계의 시작을 표현하는 동시에 왕의 권력을 드러냈다. 물을 통제하는 현실의 통치 능력과 우주의 질서를 유지하는 신의 권능이 하나의 이미지 안에서 만나는 것이다. 

전시는 이 연결을 통해 청동상 한 점을 앙코르 왕국의 사회와 정치, 종교를 읽는 창으로 제시한다.

11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비슈누상은 원래 길이가 거의 20피트에 달했던 거대 청동 조각이다. 동남아시아에서 발견된 가장 큰 고대 청동 조각으로 알려졌지만, 어느 시점에 해체돼 사원 기단 아래 묻혔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1936년 마을 주민 치틀랏의 발견을 계기로 발굴이 진행되면서 거대한 머리와 몸통, 수많은 파편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작품의 옛 모습은 최근의 보존·복원과 과학적 연구를 통해 한층 선명해졌다. 2018년 국제 연구진의 집중적인 조사가 시작됐고, 2024년에는 조각상과 파편들이 프랑스로 옮겨져 세척과 분석, 보존 처리를 받았다. 일부 파편을 몸통에 다시 연결하면서 원래 자세와 규모를 이해할 수 있는 단서도 늘어났다.

샌프란시스코 아시아미술관 3층에 전시된 크메르 유물들. 미술관은 캄보디아에서 불법 반출된 유물 13점의 소유권을 캄보디아 정부에 이전했으며, 현재 대여 형식으로 전시를 이어가고 있다.

표면 조사에서는 수은을 이용해 금을 입힌 흔적이 확인됐다. 오늘날 남아 있는 청동 표면과 달리, 원래는 조각상 전체가 금으로 덮여 있었다는 것이다. 프리뷰에서는 진사의 흔적을 근거로 입술이 붉게 채색됐을 가능성도 소개됐다. 몸통과 등, 다리의 상당 부분을 한 번에 주조했다는 분석은 당시 금속 장인들의 높은 기술 수준을 보여준다.

전시장 영상은 남아 있는 조각과 과학적 분석을 바탕으로 추정한 원래 모습을 디지털로 재현한다. 관람객은 현재의 유물과 복원 이미지를 비교하며 사라진 부분을 상상할 수 있다. 발굴 당시의 흑백사진과 연구 자료는 이 작품이 천 년 전의 제작 기술뿐 아니라 오늘날의 보존 과학까지 품고 있음을 보여준다.

고대의 물은 또 다른 영상에서 오늘의 생활로 이어진다. 캄보디아계 미국인 영화감독 프라치 리는 웨스트 바라이 주변 사람들의 하루를 담았다. 어부와 젊은 승려들의 일상을 따라가는 영상은 저수지를 과거의 유적으로만 바라보지 않게 한다. 

프리뷰에서는 평생 인근에 살면서도 섬에 가보지 못했던 젊은 승려들이 배를 타고 사원을 처음 찾는 장면도 소개됐다.

비슈누상을 본 뒤 3층 동남아시아 전시실로 올라가면 앙코르 시대의 다른 작품들과 마주하게 된다. 전시장 안내문에 소개된 10세기 비슈누상을 비롯한 고대 유물은 같은 신앙과 조형 전통이 서로 다른 모습으로 표현됐음을 살펴볼 기회다. 거대한 청동상에 집중했던 시선을 앙코르 미술의 더 넓은 세계로 옮길 수 있다.

이곳의 캄보디아 유물에는 문화유산 반환이라는 현재의 이야기도 겹쳐 있다. 미술관은 지난해 12월 크메르 유물 13점의 소유권을 캄보디아 정부에 이전했다고 발표했다. 합의에 따라 작품들이 대여 형식으로 미술관에 남아 공개되는 방식이다. 작품의 아름다움과 함께 문화유산의 소유권, 보존과 공유의 의미도 생각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샌프란시스코 아시아미술관 2층 다테우치 전시실에서 열리고 있는 ‘캄보디아 현대미술’ 전시 전경.

2층 다테우치 전시실의 ‘캄보디아 현대미술’은 시선을 오늘의 캄보디아로 돌린다. 전시는 국제적으로 활동하는 솝힙 피치와 레앙 세콘의 작품을 소개한다. 1970년대에 태어나 크메르루주 정권의 집단학살을 겪은 두 작가는 2000년대 초부터 캄보디아 미술의 재생을 이끈 주요 인물들이다.

레앙 세콘은 사진과 물감, 재활용 직물 등을 결합한 콜라주로 과거의 상처와 현재의 복잡한 현실을 다룬다. 전시장 안내문에 소개된 2010년 작품 ‘자유’도 그 작업 세계를 만나는 출발점이다. 서로 다른 재료가 한 화면에 겹쳐지는 방식은 개인의 기억과 사회의 역사를 함께 읽도록 이끈다.

솝힙 피치는 자연 재료와 버려진 물건을 활용해 추상적인 조각을 만든다. 대나무와 등나무, 철사, 플라스틱 등 일상에서 접하는 재료는 기억과 감정을 담는 조형 언어가 된다. 두 작가의 작업에는 역사적 상처뿐 아니라 환경 위기에 대한 문제의식도 담겨 있다.

고대의 청동상과 현대의 혼합재료 작품을 함께 보면 캄보디아 미술을 사원과 유적의 이미지에만 가두지 않는 관람이 가능하다. 왕국의 신앙과 권력을 표현했던 미술에서 개인의 기억과 사회적 상처, 환경을 이야기하는 미술로 질문이 넓어진다.

1층 햄브렉트 전시실의 ‘발리의 가루다’는 비슈누와 연결된 또 다른 신화의 길을 연다. 가루다는 새와 인간의 특성을 함께 지닌 신성한 존재로, 비슈누를 태우고 다니는 탈것이자 용기와 충성, 어머니를 향한 헌신을 상징한다. 이번에는 캄보디아에서 인도네시아 발리로 무대가 옮겨간다.

샌프란시스코 아시아미술관 1층 햄브렉트 전시실에 전시된 ‘발리의 가루다’ 작품. 힌두교 신 비슈누의 탈것인 신성한 새 가루다의 이야기를 발리의 목조 조각으로 표현한 작품.

전시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제작된 발리의 목조 조각과 전통 회화 등을 통해 가루다의 이야기를 펼친다. 우주의 바다에 누운 비슈누와 가루다를 타고 움직이는 비슈누를 함께 살펴보면, 같은 신화적 인물이 서로 다른 지역의 미술 속에서 어떻게 표현됐는지 비교할 수 있다. ‘발리의 가루다’는 내년 1월 4일까지 열린다.

‘비슈누의 우주 바다’는 캄보디아로 돌아가기 전 이 청동상을 볼 수 있는 미국 서부의 유일한 전시다. 샌프란시스코 아시아미술관과 스미스소니언 국립아시아미술관이 프랑스 기메 국립아시아미술관과 협력해 기획했으며, 캄보디아 정부의 승인으로 국립박물관 소장품을 대여했다.

‘비슈누의 우주 바다’와 ‘캄보디아 현대미술’, ‘발리의 가루다’는 일반 입장권으로 관람할 수 있다.

아시아미술관은 샌프란시스코 시청 건물 맞은편인 라킨 스트리트에 위치해 있다. 관람 시간은 목요일 오후 1시부터 8시, 금요일부터 월요일까지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이며 화·수요일은 휴관한다. 오는 10월 29일은 연례 갈라 행사로 휴관한다.



글·사진=최정현 기자 / choi@baynewsla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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