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숙 작가의 살아가는 이야기] 그래도 내 남편이 조금 낫지

막내동생 가족이 겨울방학을 맞아 미국에 온다고 합니다. 내가 한국에 몇 번 갔었지만 동생은 일본에 있었기에 얼굴을 못보았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시간을 내 미국까지 오는 것입니다. ‘국제운전 면허증’까지 준비해 오니까 여행 싫어하는 나는 그냥 집에만 있으랍니다. 자기들끼리 돌아다닐 수 있다면서. 그래도 쇼핑 등 가까운 곳은 내가 데리고 다녀볼 예정입니다.

문제는 ‘차’입니다. 내 차는 둘만 타는 스포츠 카. 남편차는 다리 짧은 사람은 올라 타지도 못하는 탱크같이 큰 트럭입니다. 천상 렌트 카를 장만해야 하는데 밤에는 드라이브 웨이에 세워 놓아야만 합니다. 요즘 동네가 아주 흉흉합니다. 몇년전만 해도 거의 없었던 일이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밖에 세운 차의 유리창이 깨고 금품을 털어가는 일 말입니다. ‘넥스 도어’라는 사이트에는 한 주민이 지난 5년 동안 차 유리창이 깨지는 사건을 네 번, 배달된 소포가 없어지는 사건을 셀 수 없이 겪었다면서 ‘도대체 요즘 이 미국이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고 개탄했습니다.

걱정이 아니 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우리 차도 아닌 렌트 카에 그런 불상사가 일어난다면 얼마나 골치가 아플까요. 동생이 도착하기 일 주일 전 아침, 나는 남편에게 이 점을 의논하려 했습니다. 렌트 카를 어디다 세워야 안전할지를요. 남편이 말합니다.
“예전에는 일절 이런 범죄가 없었어. 차고문을 밤새 열어놓고 자도, 자전거를 집앞 잔디밭에 아무렇게나 몇날 며칠을 던져놓아도 그 누구 하나 건드리는 사람이 없었지. 요즘 차를 바깥에다 세우지 못할 정도로 범죄들이 많이 증가한 것은 하루에도 몇 천명 씩 국경을 유유하게 넘어오는 불법 체류자들 때문이야. 영어도 못하고 돈도 없고 신분도 없는 그들이 미국에 넘어와서 목숨을 부지하려면 할 수 있는 일이 뭐겠어? 범죄밖에 더 있겠어?“

남편은 불법으로 국경을 넘어오는 사람들에 관대한 정부를 탓하기 시작합니다. 불법체류자에게 무료 메디칼이며 주택 보조며 현금 보조를 허용해 주는 정부를 비난하고 성토하기 시작합니다. 법을 어긴 사람들에게 그런 식으로 온갖 혜택을 주면 법을 지켜 돈 들이고 시간 들여 이민수속을 밟고 있는 사람들은 뭐가 되냐며 목청을 높히기 시작합니다. 정부에 대한 분노로 얼굴까지 빨개집니다. 내 얼굴도 빨개집니다. 렌트 카를 어디다 세울 것인지에 대한 답은 없이 혼자 흥분해 설치는 남편에 대한 짜증과 울화로.

남편은 십 몇년전에 생겼던 차 사고까지 끄집어냅니다. 백 프로 상대방 과실로 생겼던 큰 사고였습니다만 상대방이 보험도 없는 불법체류자였던지라 꼽다시 우리가 다 뒤집어 썼던, 생각만으로도 화가 치밀어 오르는. 그러나 지금 내가 말하고저 하는 주제는 그게 아니지 않습니까. 나는 참지 못하고 소리를 꽥 질렀습니다. 당신은 왜 내가 A에 대해 이야기하면 B,C,D를 넘어 Z까지 가냐? 내가 A에 대해 언급할 때는 제발 A에 대해서만 대답을 해라!

렌트 카를 어디다 세울 것인지에 대한 결론은 얻지 못 한 채 싸움만 하고 말았네요. 나는 식식거리며 밖으로 나왔습니다. 치과 예약이 되어 있었거든요. 치과에 가 있는 동안도 화가 가라앉지가 않습니다. 한 할배가 자기가 다시 결혼한다면 인물, 학벌, 집안, 성격 안 보고 무조건 ‘대화가 되는 여자랑‘ 이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습니다. 오죽했으면하는 동조의 마음이 들었습니다. 정말 오죽 대화가 안 되었으면요. 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내 말을 끝까지 경청해주고 공감해주는, 내가 사과에 대해 말하면 배, 살구, 수박, 복숭아로 넘어가지 않는, 정말이지 대화가 되는 남자와 살고 싶습니다.

치과에서 나와서 한국마켓에 들렀습니다. 죽어도 가기 싫었지만 동생을 굶길 수는 없습니다. 라면이랑 식료품들을 좀 사다놔야 할 것 같습니다. 평일이라 크게 붐비지 않는 채소 코너에서 파를 봉지에 담고 있는데 뒤에서 한국남자 목소리가 들립니다.
“무우는 겨울에 난 것이 달고 좋지. 생채를 해서 강된장을 끓여 비벼 먹어도 좋고 깍두기를 담가도 좋고 밤에 텔레비젼 보면서 간식으로 깎아 먹어도 좋고…” 슬쩍 돌아보니 예순 중후반 쯤 되어 보이는 남자가 부인인 듯한 여자랑 무우를 고르고 있습니다. 그런가보다고 걸음을 옮겨서 단무지 코너를 갔는데 그 부부가 따라왔나 봅니다. ‘한국산’을 찾기 위해 냉장고 유리문 앞을 기웃거리고 있는데 남자 목소리가 또 들립니다. 연두부를 사다가 갈은 돼지고기를 넣고 주물주물해서 동그랑땡을 해먹을까? 뚝배기에 순두부로 끓여도 좋고. 아니면 두부 넣고 고추장 찌개를 해 먹을까…

참 가정적인 남자도 다 있네라고 생각했는데요. 가정적인 남자라기엔 이상하리마치 여자의 반응이 없습니다. 뒤돌면서 얼핏 본 여자의 얼굴. 만면에 지겨움이 가득, 체념이 가득, 울화가 가득, 짜증이 가득입니다. 뭐라고 할까. 제발 좀 입 좀 닥쳐 줄래? 하는 무언의 표시가 가득한.

어떻게 하다가 보니 그 부부와 나의 동선이 같아졌는데 엄마야! 남편의 입이 잠시도 쉴 틈이 없네요. 기름 코너에서는 참기름과 들기름의 차이점을 길게 설명하는 남자의 목소리를 들어야했고 주류 코너 옆에서는 비가 안 오면 뒷뜰에서 삼겹살을 구워서 친구들과 소주를 한 잔해야겠다는 남자의 주말 계획을 들어야했습니다.

바위같이 과묵한 남자도 힘들지만 저렇게 촉새같이 1초도 쉬지 않고 입을 놀리는 남자랑 사는 것도 고역이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살림용품 코너로 카트를 끌었습니다. 국자를 하나 사야했거든요. 어머나, 공교롭게도 그 부부가 또 왔습니다. 양은 냄비를 사나 봅니다. 냄비 두껑들을 하나 하나 들추어보고 두드려보면서 역시 남자는 입을 가만 두지 않네요. 자기가 젊을 때 자취를 했는데 옆방에 동향의 남자가 살아서 가끔 둘이서 연탄불에 양은 냄비를 올려 라면을 끓여서 어쩌고저쩌고. 이제는 내가 다 피곤합니다. 여자의 얼굴에 나타난 짜증을 이해할 것 같습니다.

쇼핑을 마치고 계산대에 섰는데 남자의 목소리가 또 들립니다. 고개를 빼고 보니 계산대 저쪽에 부부가 섰는데요. 계산원이 ‘양은 냄비를 사셨네요’라고 지나가는 말처럼 한 마디 한 모양입니다. 그 말에 ‘예’하고 끝날 남자가 아니지요. 라면 끓여 먹으려고요. 라면 맛은 역시 양은 냄비가 최고지요. 집에 7종 바닥의 고급 냄비가 있지만 양은 냄비에 끓인 거랑 맛이 달라요. 요즘 비도 자주 오겠다. 비오는 날에는 양은 냄비에 라면을 끓여서… 주저리주저리. 블라블라… 으아! 정말로 딱 질립니다. 단 십 몇분을 같이하는 데도 머리가 지끈지끈할 지경인데 평생을 같이해야 하는 여자는 어떨까.

마켓을 나오는데 허허 웃음이 나왔습니다. 내 남편이 낫다는 생각이 들어서. 늘 빗나가는 대화로 염장을 지를지언정 쉬지않는 입으로 내 머리를 아프게 하지는 않거든요. 집으로 향하는 내 발걸음이 바빴습니다. 있는대로 신경질을 부렸으니 맛있는 점심으로라도 만회해야겠어서.

이계숙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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