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숙 작가의 살아가는 이야기] 기쁘게 밥값을 내는 이유

몇 년 전, 한국 방문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국에 도착한 지 며칠 후, 이름도 얼굴도 기억에 전혀 없는 친구 몇몇이 나를 보고 싶다고 연락해 왔습니다. 이 예쁜 얼굴을 안 보여 줄 이유가 없지요. 약속을 정했어요. 그들이 나를 초대한 곳은 부산의 한 유명 한우갈비집.

남자 셋과 여자 둘이 나왔습니다. 그 중 한 남자 친구는 조금 낯이 익었습니다. ‘밴드’에 사진으로 소개된 걸 봤거든요. 모교에 엄청난 돈을 기부했다고. 학교에서 열등생이 사회에서는 우등생이라는 말을 몸소 보여준 친구였습니다. 지지리도 공부를 못했었던 아이였는데 사업가적인 기질이 있었나 봐요. 그 기질을 발휘해 엄청 돈을 많이 벌었답니다. 통도 커서 여기저기에 돈을 아주 잘 쓴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날도 그가 말했습니다. ”미국친구를 위해 비싼 한우갈비집으로 왔으니 돈 걱정하지 말고 모두들 실컷 먹어라. 오늘 밥값은 내가 낸다!”

나를 포함해 여섯명이 부어라, 마셔라 엄청 먹었습니다. 술을 포함한 밥값이 기십만원 나왔을 것 같았어요. 나는 화장실에 다녀온다고 말하고 밥값을 치렀습니다. 밥값을 다 치른 후에도 소주 몇 병을 더 시켰기에 몰래 나가서 그것도 마저 냈습니다. 얻어 먹는 것은 편치 않으니까. 더구나 별로 친하지도 않은 친구로부터.

내가 밥값을 다 지불한 걸 나중에 안 사업가친구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습니다.
“고맙다, 계숙아! 정말로정말로 고맙다! 고마움을넘어서 감격과 감동이다!”
말로만 하는 게 아니라 테이블을 빙 돌아와서 팔 벌려 나를 껴안기까지 해요. 한달 매출이 수억이라는 사업가한테는 ‘껌값’정도의 돈이었을텐데 유난스럽다고 생각했는데요. 이유가 있었네요.

2차로 노래방에 모두 몰려 갔는데 내 옆에 앉은 사업가친구가 귓속말을 합니다.
“여태껏 친구들에게 수백 번, 수천 번 밥을 샀지만 나 대신 미리 밥값을 내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네가 처음이었어. 비싼 데를 가나, 싼 데를 가나, 인원이 많든 적든 돈 낼 때 되면 모두들 나만 바라보았지. 나 역시 내가 부담하는 걸 당연하게 여겼었고…“
큰 사업을 하니까 늘 돈이 마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친구들의 식사비를 전담해 왔다는 친구. 그가 다시 말했습니다.
“돈이 많다고 해서 내 돈 쓰는 게 아깝지 않은 게 아니야. 내 주머니에서 나가는 돈은 너 나할 것 없이 아깝기 마련 아닌가. 가끔은 나도 친구들이 사주는 밥을 얻어먹고 싶은데 한 놈도, 한 년도(그는 ‘놈’과 ‘년’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런 호의를 베풀지 않더라. 지금은 옛날처럼 아무한테나 마구 밥을 사지 않아. 꼭 필요하다 싶은 자리에서만 돈을 내지…“

얼마전 한 할배가 나를 비롯해 열 다섯명을 한 식당에 초대했습니다. 일 년에 두어번 정도는 꼭 한턱 크게 쓰는 할배라 우리는 부담없이 초대에 응했고 음식값에 구애받지 않고 마음껏 저녁을 잘 먹었습니다. 먹으면서도 우리는 밥값이 과연 얼마나 나올까 궁금했습니다. 미국 패밀리 식당이라 하나, 술 마시는 사람이 없어 술을 안 시켰다 하나 적어도 5백불 이상은 나올 거라고 짐작들을 하면서.

자리가 파할 무렵입니다. 테이블 한쪽이 왁자지껄합니다. 우리를 초대한 할배한테 청구서가 갔는데 옆에 앉은 할배가 그 청구서를 가로챈 것입니다. 자기가 그동안 늘 얻어만 먹고 신세를 많이 져서 이번에는 자기가 내겠다고. 우리를 초대한 할배는 그렇게 되면 체면이 안 서니까 처음 계획대로 자기가 낼 거라고. 서로 내겠다고 고집부리고 씨름을 하다가 결국은 옆에 앉은 할배가 이겼습니다. 그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자신의 크레딧 카드를 웨이트리스에게 넘겼습니다. 그 광경을 보는 나의 가슴이 뜨거웠습니다. 몇 십불도 아닌 수백불의 밥값을 서로 내겠다고 싸우는 사람들이라니. 너무나 아름다운 사람들이지 않습니까.

사업가친구가 말했듯이 내 돈 안 아까운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안 아까울 때도 있어요.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해 쓸 때, 그때는 오히려 기분이 좋습니다. 사업가친구도 처음에는 기꺼이 즐겁게, 기분좋게 주머니를 풀었을 겁니다. 그러나 얻어먹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친구들이 늘어가면서, 어딜 가나 사업가친구가 계산하기를 바라는 친구들이 늘어가면서 마음이 바뀌었겠지요. 섭섭하고 괘씸한 마음이 들었겠지요.

다행히도 내 옆에는 얻어먹는 것을 당연시하는 얌체들은 없습니다. 내가 밥을 사면 그들은 나중에 김치 한 보시기라도, 갓 부친 부침개 한 조각이라도 갖다 줍니다. 그것으로 족합니다. 나를 위해 김치를 덜어내는 마음, 부침개 한 쪽을 싸는 마음, 그 마음이 그저 고마울 뿐입니다. 내가 늘 기쁘게 밥값을 내는 이유입니다.

이계숙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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