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숙 작가의 살아가는 이야기] 늙으니까 달라지는 것

한국에 가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공중목욕탕에 가는 일, 둘은 연변 교포가 운영하는 바디 마사지업소에 가는 일. 코로나바이러스가 인류를 덮친 지난 몇 년동안 공중목욕탕에는 못 갔습니다. 행여 코비드 걸릴까 봐. 공중목욕탕과는 달리 바디 마사지는 모두 다 마스크를 쓸 뿐만 아니라 마사지사 한 사람, 주인 한 사람 외엔 다른 사람과 대면할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안심해도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동생집에 도착해서부터 떠나올 때까지 매일이다시피 갑니다. 미국서 받는 마사지와는 질이 다르기에. 마사지사를 미국으로 보쌈해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면 말 다했지요.

그렇게 좋아하던 마사지를 이번 방문에는 참아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몸인데 타인의 물리적인 힘이 가해지면 더 탈이 날까 봐서요. 몸의 진액이 다 빠졌답니다. 원기부족, 영양부족 상태랍니다. 몸 보호하는 식품과 약재를 먹으면서 그저 얌전히 있어야 했어요. 그런데 고향을 떠나기 하루 전, 짐을 싸는데 갑자기 억울한 마음이 드는 거예요. 한국에 가는 목적이 동생들, 친구들 얼굴 보는 것 외에 마사지도 들어가는데 그냥 떠나기가요. 그래서 ‘몸이 덧나면 덧나는 거고’하는 배짱으로 마사지를 받으러 갔습니다. 그날따라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억수로 오고 있었습니다만 늘 하던대로 2마일 정도 되는 거리를 걸어서 갔습니다.

“미국에 살면서 인종차별은 못 느끼나요? 나는 한국에서 ‘짱깨’ ‘철가방’이라 불리우면서 모멸적인 차별을 엄청 받아요”하고 눈물을 흘리던 노랑머리, 문신투성이의 마사지사는 안 보였어요. 그가 참 마음에 들었었는데. 대신 작은 키에 스포츠 머리를 한 삼심대 초반 정도의 남자가 헐렁한 츄리닝바지 차림으로 나를 맞았습니다. 내 얼굴에 나타나는 실망의 빛을 보았는지 주인이 황급하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도 잘 해요. 지난 번 그 마사지사보다 더 잘해요.

어쨌든 마사지를 받기로 했습니다. 업소에서 제공하는 면 반바지와 윗도리로 환복하고 엎드려 있으니 남자가 들어옵니다. 짙은 연변 억양으로 몇 마디를 하고는 마사지를 시작합니다. 아닌 게 아니라 주인 말처럼 남자의 솜씨가 대단합니다. 지난번 그 노랑머리 문신 투성이 남자보다 기량이 훨씬 뛰어난 것 같습니다. 지난번 마사지사도 그랬던 것처럼 오일을 전혀 바르지 않아요. 수건 한 장만 덮게 하고 그 수건 위로 그의 손가락이 뱅글뱅글 물고기처럼 유연하게 돌아가는데 혈을 정확히 알아요. 운동은 늘 하면서 스트레칭을 제대로 안 해줘서 뭉칠 대로 뭉친 근육이 다 풀리는 것 같습니다. 나는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잘하는 사람이 미국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한 번에 백불이라도 비싸다는 생각이 안 들 건데. 위에도 말했지만 미국에서 받는 마사지는 마사지라고 이름붙이기도 창피할 지경입니다. 오일만 잔뜩 말라 쓱쓱 문지르는 정도.

나는 남자의 기묘한 손놀림에 흠뻑 빠져들었습니다. 바깥에는 비가 마구 오고 있지요(내가 빗소리를 참 좋아합니다). 몸 밑은 전기장판이 켜져 알맞게 따뜻하지요. 찬 비에 젖었던 몸이 편안하게 이완됩니다. 천국이 이럴 거다, 하는 만족감에 잠에 슬핏 빠져들려고 합니다. 문제는 다음부터입니다. 몸 뒷쪽을 끝내고 천장을 보고 누운 자세를 취했는데 이 남자의 손가락놀림이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겨드랑이 바로 밑과 사타구니 쪽의 와이 존(Y zone)임파선 부분에 노폐물이 제일 많이 쌓이는 곳이라면서 힘을 주기 시작할 때부터였어요. 의도적인지 실수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손가락이 계속 나의 중요한 부위를 슬쩍슬쩍 터치하는 겁니다.

나는 방금 전의 잠으로 빠져들 듯한 노글노글한 기분에서 얼른 깨어났어요. 이놈이 이런 식으로 여자들을 슬슬 달아오르게 해서 ‘일’을 치르는 게 아닐까, 하는 의혹이 머리를 채우면서 남자의 손길이 불편해지고 긴장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면바지나 청바지를 입고 있던 예전 마사지사와는 달리 고무줄이 늘어난 츄리닝을 입고(여차하면 벗기 좋게?!)있는 것도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고요. 굳게 닫힌 방문. 단 둘만 있는 방안입니다. 일을 치르려면 얼마든지 가능한 상황.

벌떡 일어나야 한다고 작정은 했지만 만약 내가 짐작한 게 아니었다면 어떡합니까. 남자가 그저 자신의 직무에 충실할 뿐이었다면 어떡합니까. 나는 남자가 무안하지 않게 거부 의사를 보일 기회를 보느라 고심했습니다. 그러다가요. 불현듯 내 나이를 떠올렸어요. 내년이면 환갑입니다. 아줌마도 한참 넘어선 할머니입니다. 운동 덕분에 또래들의 몸과 비교해 전체적으로 단단하다고는하나 나같은 할머니한테 무슨 흑심이 생기겠나하는 자각을 한 거예요. 일을 벌이려면 젊은 여자, 예쁜 여자도 얼마든지 있을 텐데 말이지요.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불 위의 오징어처럼 잔뜩 움추려들었던 몸도 펴졌습니다. 나는 느꼈습니다. 아, 나이들어서 좋은 점도 있구나. 젊었을 때라면 민감하게 받아들일 상황도 나이가 드니까 달라지는구나 하는.

나보다 세살 많은 지인이 말했습니다. 나이가 드니까 ‘남과 여’라는 차이점이 없어진다고. 젊었을 때라면 남의 남자와 말 한 마디 나누는 것도 조심스러웠는데 ‘할머니’가 되니까 아무리 잘생기고 멋있는 남자도 그냥 인간 대 인간이 된다는 것입니다. 남녀라는 구분이 모호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편하다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나 역시 그렇게 되더군요. 워낙 내 주위에 할배들뿐이기도 하지만 새로운 남자를 봐도 그냥 ‘사람’으로만 대해집니다. 뿐만 아닙니다. 나이드니까 인간의 관계에 대해서도 무덤덤해집니다. 좋은 사람에 대한 집착도 싫은 사람에 대한 경계도 없어집니다. 아주 자유롭습니다.

대신 생명에 대한 측은지심은 더 많이 생겨요. 길 가다가 무심코 내 발에 밟힌 개미 한 마리에도, 집에 들어온 파리를 죽여놓고도 죄책감이 들어요.

특급호텔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미연이는 고향친구들과 합류하고 부산친구 부부와 나는 기장에 있는 한 식당으로 아침겸 점심을 먹으러 갔습니다. 부산친구가 내 몸 보신시켜 준다며 주문한 게 ‘꼼장어’. 처음 먹어보는 음식입니다. 그동안 꼼장어가 어찌 생겼는지도 몰랐더랬습니다. 잔뜩 기대를 하고 기다렸지요. 조금 후, 프라이팬에 담겨져 온 꼼장어를 보고 나는 기함하는 줄 알았습니다. 껍질을 벗겨 토막까지 친 그 생물이 프라이팬 안에서 꿈틀거리면서 막 움직이는 겁니다. 그러니까 조금 전까지만 해도 수족관 안에서 힘차게 헤엄치던 그 장어가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린 겁니다. 예전같으면 무덤덤했겠지요. 그런데 나이가 드니까요. 비록 우리 인간을 위해 태어난 생물들이라지만 단지 내 혓바닥을 즐겁게 하자고 잡아 먹는다는 일이 참 죄스러워져요. 그래서 원래 육류나 어류를 좋아하지 않은 식성이지만 생명을 가지고 있는 음식은 자꾸 피하게 됩니다.

생명있는 것들에 대한 존중심은 동물이나 생선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모든 것들을 의인화, 즉 기계나 사물 등 인간이 아닌 것에 인격을 부여하게 됩니다. 최근, 5, 6년동안 우리집 바닥을 책임졌던 자동청소기가 수명을 다했습니다. 뭐든 아낌없이 잘 없애고 잘 버리는 나지만 그 자동청소기를 쓰레기통에 던져 넣는데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마음이 아파서요. 미안해서요.

사실 나는 욕심많고 심술많고 시기도 많아서 남이 잘 되면 배부터 아픈 사람입니다. 나이가 드니까 변합니다. 내 주위의 모든 사람들, 생명있는 모든 것들에게 자비심이 생깁니다. 모두 두루두루 행복했으면 좋겠고 편안했으면 좋겠고 잘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이계숙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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