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숙 작가의 살아가는 이야기] 살면서 겪었던 가장 황당했던 일 세 가지

동생가족이 왔습니다. 일본에 유학가 있던 동생과 한국에 있는 올케와 영국에 유학가 있던 조카가 우리집에서 합류했습니다. 어항 속처럼 조용하고 고즈넉한 집안이 시끌시끌 요란한 시장터로 변했습니다. 늘 텅텅 비어 있던 냉장고는 식료품으로 산을 이루고 매끼마다 지지고 볶는 음식냄새가 집안을 가득 채웁니다. 강아지와 산책하러 나갈 때 신는 운동화 한 켤레만 달랑 있던 현관도 널부러진 신발들로 어지럽습니다. 그 신발들을 보니 아주 오래전에 있었던 아주 황당한 일이 떠올랐습니다.

남편과 이혼하고 혼자 몸으로 아들 둘을 키우면서 사는 여성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되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나보다 서너살 많아 언니로 부르며 내가 많이 의지하고 좋아했었습니다. 퍼주기 좋아하는 내가 혼자 어렵게 사는 그녀를 소홀히 했을 리가 없습니다. 비싼 시계를 생일선물로 사주고 때때로 옷도 사주는 등 그녀로 향하는 내 마음을 최대한 표현했습니다. 물론 그녀도 내가 잘 먹는 반찬들을 해다주었지요.

당시에도 동생가족이 미국에 놀러왔습니다. 사람이 많으니 지금처럼 현관에 신발이 한가득입니다. 세월이 가고 나이가 들면서 신발이 널려 있는 현관이 별로 개의치 않는 일이 되었습니다만 그때만해도 결벽증이 중증이었어요. 나를 들들 볶고 살았습니다. 바늘 끝 하나 흐트러져 있는 꼴을 보지 못할 때였어요. 그래서 언니에게 하소연을 했어요. 현관의 신발들이 눈에 거슬려서 미치겠다고. 그녀가 말했어요. 신발 세 켤레가지고 뭘 그러냐. 우리집 현관엔 아무렇게나 자빠져 있고 엉켜져 있는 신발들이 항상 열 켤레가 넘는다…

그녀는 당시 유학생 세 명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있었거든요. 돈을 받고. 그 이야기를 중앙일보에 칼럼으로 썼습니다. 고작 현관의 신발 서너켤레로 불편해했는데 하숙을 치는 한 지인에 비하면 나는 새발의 피다. 반성하자는 내용으로. 글이 나가자마자 그녀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막 화를 냅니다. ‘홈 스테이’로 하지 않고 ‘하숙집’으로 표현했다고. 자기가 졸지에 하숙집 아줌마가 되었다고. 익명으로 쓴 글에 홈 스테이나 하숙집이나 뭐가 다를까요. 그녀의 시퍼런 기세에 눌려 사과를 했습니다만 아직도 황당한 일로 기억되는 일입니다.

또 있습니다. 중앙일보 기자로 일 할 때 있었던 일입니다. 흑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소녀가 그림에 두각을 나타냅니다. 각종 미술대회에서 상을 석권할 정도로. 자랑스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구나 그 어머니는 이래저래 나랑 좀 아는 사이입니다. 당연히 인터뷰 기사가 나갔지요.

신문이 나온 날 저녁, 소녀의 어머니가 전화를 했네요. 마구 소리를 지르며 따집니다. 기사 첫 머리, ‘흑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소녀’란 대목이 마음에 안 든다는 겁니다. ‘흑인 아버지’란 부분이. 아니, 없는 사실을 말한 것도 아니고 사진에서 누가 봐도 흑인 혼혈이라는 걸 알 수 있을 텐데도 ‘흑인 아버지’란 말을 쓰지 말아야 했다는 겁니다. 얼마나 황당했어야지요. 요즘도 가끔 한국마켓이나 식당에서 그 어머니를 마주칠 때가 있습니다. 반갑게 인사는 하지만 그때의 황당했던 기억이 떠올라서 씁쓸하지요.

위의 두 이야기는 지금부터 들려드릴 황당한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잘 들어 보세요. 중앙일보 기자일을 그만 두고 미국직장에 다니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중앙일보 본사로부터 연락이 왔어요. 한국에서 어떤 사람들이 나를 애타게 찾는답니다. 무슨 일일까, 전달받은 한국의 전화번호로 전화를 했습니다. 젊은 여성이 받습니다. 부탁을 하나 하겠답니다. 부탁도 아주 큰 부탁입니다. 자기 아버지가 내일 모레 나이가 일흔인데 죽기 전에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을 만나보고 싶어한답니다. 그런데 몇 십년전 미국으로 건너 간 그 여동생의 생사도, 거처도, 연락처도 모른답니다. 그나마 가지고 있는 것은 내가 중앙일보 기자할 때 쓴 기사 한 편. 그러니까 여자 아버지가 찾는 여동생의 아들에 대해 쓴 기사였어요. 무슨 자동차 경주에 서 우승을 했기에 사진과 함께 나간 기사였습니다. 한국에서 이름으로 인터넷 조회를 해보다가 그 기사를 찾아낸 것입니다. 여자가 호소했습니다. 아버지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고 싶다고. 제발 자신의 고모를 찾아달라고. 반드시 보상을 하겠다고.

참 난감했습니다. 당시 그 기사를 쓴 지가 십 몇년이 넘었을 뿐만 아니라 신문사를 그만 두면서 수첩에 적인 연락처를 다 없애버렸지요. 이름과 나이를 토대로 다각도로 모색해봤지만 찾아낼 방법이 없었습니다. 내가 형사도 아니고 흥신소 직원도 아니었기에요. 시간은 흐르는데 그냥 큰 벽에 부딪친 기분이었습니다.

여자는 매일 이메일로 상황을 확인(그때는 내가 셀폰이 없을 때입니다. 집전화와 이메일로 소통을 할 때)합니다. 무슨 진전이 없냐고. 언제 쯤 찾을 수 있겠냐고. 아버지가 고모를 보고 싶어 매일 울고 계신다고. 이메일을 열어보기가 무서울 정도였습니다. 보름을 그 여자의 재촉에 시달리다가 나는 큰 결심을 했습니다. 회사의 프로그램을 이용하는 것이었습니다. 회사에는 캘리포니아 주 정부 혜택을 받는 65세 이상의 주민들의 정보를 모아놓은 데이터가 있었습니다. 나이로 봐서 고모라는 여자가 정부 혜택을 받고 있을 것 같았어요. 그러나 개인적인 일로 그 데이터를 열어보는 것은 무서운 일이었습니다. 발각되면 그 자리에서 해고입니다. 해고까지 각오하고 나는 그 데이트를 열고 한국에서 찾는 여성의 이름과 나이를 넣었습니다. 재깍 찾아낸 것은 두말 할 것도 없지요.

나는 회사에서 찾은 정보를 바탕으로 고모라는 여자에게 얼른 전화를 했습니다. 기쁘고 흥분된 마음으로요. 내 소개를 한 후 한국의 연락처를 전해 주었지요. 며칠 후 한국에서 이메일이 왔어요. 고맙다고. 아버지가 고모 전화를 받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정도였다고. 다음달에 아버지랑 온 식구들이 고모보러 미국으로 오기로 했다고. 그리고는 끝이었습니다. 두 번 다시 연락이 없더군요. 이메일도 전화도요. 고모를 찾아 주기만 하면 큰 보상을 하겠다더니 막상 찾아 주니 입을 싹 닦아요. 화장실 들어갈 때 다르고 나올 때 다르다더니. 다급할 땐 간이라도 뻬 줄 듯 읍소하고 상황이 나아지면 너 언제 봤더냐 하는 사람들,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어요. 당연히 보상을 바라고 도와준 건 아니지요. 그렇지만 도리라는 게 있고 예의라는 게 있습니다. 고모와 아버지가 만나 회포를 잘 풀었다는 후속 이야기만 내게 간단하게 전해 주었어도 그렇게 괘씸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이 글을 그 여성이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가 겪었던 황당하고 어이없는 일 몇 개 중 첫 번째로 꼽히는 일이었다는 걸 그녀가 알았으면 좋겠네요. 그녀는 지금 어느 하늘 아래에 있을까요. 어디서 누구를 이용해 먹으려고 눈을 굴리고 있을까요.

이계숙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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