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밸리 빈부격차 심화…상위 10%가 전체 부의 75% 독식

하위 50% 보유 자산은 전체의 1%에도 못 미쳐
평균 연봉 19만달러 육박해도 주거·생활비 부담 가중
AI 호황 속 자산 보유 계층 중심으로 부의 집중 심화

산호세 다운타운 모습. 자료사진.
세계 최대 기술기업과 억만장자들이 밀집한 실리콘밸리에서 부의 집중 현상이 더욱 심화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역 전체가 막대한 부를 창출하고 평균 임금도 미국 최고 수준을 기록하고 있지만, 정작 상당수 주민들은 치솟는 주거비와 생활비를 감당하지 못하면서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면서 동시에 가장 불평등한 지역’이라는 실리콘밸리의 양면성이 더욱 뚜렷해지고 있다.

지역 경제 연구기관인 조인트 벤처 실리콘밸리 산하 실리콘밸리 지역연구소가 발표한 ‘2026 실리콘밸리 인덱스’에 따르면 실리콘밸리 가구가 보유한 유동자산 규모는 2025년 기준 약 1조1,700억 달러에 달한다. 그러나 이 가운데 무려 75%를 상위 10% 가구가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전체 가구의 절반에 해당하는 하위 50%가 보유한 자산은 전체의 1%에도 미치지 못했다.

실리콘밸리의 부가 극소수 계층에 집중되는 속도도 빨라지고 있다. 조인트 벤처 실리콘밸리 자료에 따르면 상위 10%가 차지하는 지역 전체 부의 비중은 2023년보다 5%포인트 증가한 75%까지 올라갔다. 실리콘밸리에 거주하는 약 45만 가구에 달하는 하위 절반이 나눠 갖는 자산은 전체의 1%가 채 되지 않는 것과 극명한 대조를 보인다.

억만장자들의 자산 규모는 더욱 압도적이다. 보고서는 실리콘밸리 지역 억만장자들이 보유한 부가 1조1천억 달러에 육박한다고 분석했다. 세계적인 인공지능 열풍과 기술기업 주가 상승, 벤처 투자 확대 등이 막대한 자산 증가로 이어지고 있지만 이런 부의 증가가 지역 주민 전체로 확산되기보다는 주식과 부동산 등 자산을 이미 보유하고 있는 계층에 집중되고 있다는 것이 보고서의 분석이다.

레이철 마사로 조인트 벤처 실리콘밸리 부회장 겸 연구책임자는 현재 실리콘밸리에서 경제적 안정 여부는 단순히 얼마나 많은 급여를 받느냐보다 자산을 얼마나 축적할 수 있느냐에 의해 점점 더 크게 결정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주택과 투자자산을 보유하고 여기에서 발생하는 소득과 안정성을 누릴 수 있는지가 임금 자체보다 경제적 기회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실리콘밸리의 임금 수준은 미국에서도 압도적으로 높다. 2025년 지역 평균 연봉은 18만9천 달러에 달했고 중간 가구소득도 16만2,800달러를 기록했다. 중간 가구소득은 캘리포니아 평균의 약 1.6배, 미국 전체의 거의 두 배 수준이다. 그럼에도 상당수 주민들이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점이 실리콘밸리 경제의 가장 큰 모순으로 지적된다.

보고서는 실리콘밸리 근로연령 가구 가운데 4분의 1 이상이 정부 지원이나 민간 지원 없이 주거비와 식비, 의료비, 보육비 등 기본적인 생활비를 스스로 충당하지 못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연봉 10만 달러 이상을 받아도 주거비와 생활비를 제외하면 실질적인 자산 형성이 쉽지 않은 지역 경제구조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의미다. 자산을 이미 보유한 계층과 월급에 의존하는 계층 사이의 격차가 시간이 지날수록 더 벌어질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가장 큰 부담은 역시 주택이다. 2025년 말 실리콘밸리 단독주택 중간가격은 198만 달러까지 치솟았다. 거래된 주택의 절반 이상이 200만 달러를 넘어섰으며, 처음 집을 구입하려는 주민 가운데 이런 가격을 감당할 수 있는 비율은 약 25%에 불과한 것으로 분석됐다. 다시 말해 지역 주민 4명 가운데 3명은 첫 주택 구입 단계에서부터 실리콘밸리의 일반적인 주택가격을 감당하기 어려운 셈이다.

내 집 마련을 포기하고 임대로 거주하는 주민들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실리콘밸리 세입자의 44%는 소득의 30% 이상을 주거비로 지출하고 있으며, 21%는 소득의 절반 이상을 월세 등 주거비로 사용하고 있다. 특히 65세 이상 세입자의 경우 67%가 주거비 부담 가구로 분류됐으며 주택을 보유한 노년층에서도 30%가 소득에 비해 과도한 주거비 부담을 안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주택난은 가족 구성과 생활방식까지 변화시키고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실리콘밸리 젊은 성인 10명 가운데 3명은 부모와 함께 거주하고 있으며 전체 주민의 약 4분의 1은 여러 세대가 한 집에서 함께 생활하는 다세대 가구에 속한다. 높은 임대료와 주택가격 때문에 독립이나 결혼, 출산을 미루는 젊은층이 늘어나고 지역을 떠나는 주민들도 계속 발생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주거불안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인 노숙 문제도 계속되고 있다. 보고서는 실리콘밸리 지역 노숙자가 약 1만2,900명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했으며 장기 노숙자뿐 아니라 자녀를 둔 가족 노숙자도 증가하고 있다고 밝혔다. 세계 최대 기술기업들이 수천억 달러의 기업가치를 만들어내는 지역에서 안정적인 주거 공간조차 확보하지 못하는 주민들이 수만 명에 육박하고 있는 것이다.

생활비 부담은 식생활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산타클라라와 산마테오 카운티에서는 2024~2025년 식량지원 기관 등을 통해 3억1천만 끼 이상의 음식이 주민들에게 제공됐다. 실리콘밸리의 평균 임금과 가구소득이 미국 최고 수준임에도 불구하고 무료 또는 저비용 식품 지원을 필요로 하는 주민 규모가 여전히 상당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 같은 현상은 실리콘밸리 경제가 침체돼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지역의 혁신경제는 여전히 강력하다. 2025년 실리콘밸리에는 약 920억 달러의 벤처투자가 몰렸고 이 가운데 약 800억 달러, 전체의 83%가 인공지능 관련 기업에 집중됐다. 실리콘밸리에는 기업가치 10억 달러 이상인 이른바 ‘유니콘 기업’이 312개에 달하며 미국 전체 유니콘 기업의 약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100억 달러 이상의 기업가치를 가진 ‘데카콘’도 27개에 달한다.

2025년 실리콘밸리에서 등록된 특허도 2만3천 건을 넘어섰고 노동자 1인당 지역총생산은 33만6,515달러에 달했다. 세계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생산성과 혁신 역량을 갖춘 지역이지만 그 경제적 성과가 모든 주민에게 동일하게 돌아가지는 않고 있는 것이다.

고용시장에도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실리콘밸리 전체 고용은 2024년에서 2025년 사이 약 1만3,100개, 0.8% 감소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기술기업들이 약 4만 명 규모의 인력 감축을 단행한 상황에서도 전체 실업률이 급격히 상승하지는 않았지만, 보고서는 인공지능 확산이 향후 고용시장에 새로운 변수가 될 것으로 전망했다. 현재 실리콘밸리 일자리 가운데 약 41만 개는 인공지능이 수행할 수 있는 업무를 일부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러셀 핸콕 조인트 벤처 실리콘밸리 회장 겸 최고경영자는 지역 경제가 팬데믹 이후 대규모 감원을 흡수하면서도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주민들이 느끼는 경제적 압박은 매우 크다고 지적했다. 기술기업과 투자자들에게는 막대한 부가 새로 만들어지는 반면 주택을 보유하지 못하거나 주식·투자자산이 많지 않은 주민들에게는 높은 임금조차 치솟는 생활비를 따라잡기 어려운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보고서는 실리콘밸리의 경제적 문제가 단순한 ‘저소득층 빈곤’만으로 설명될 수 없다는 점도 보여준다. 연방정부 기준으로 보면 실리콘밸리의 빈곤율은 상대적으로 낮지만, 실제 지역 생활비를 반영하면 상황이 크게 달라진다. 주택과 보육, 교통, 식비, 의료비 등이 미국 평균보다 훨씬 높은 상황에서는 전국적으로 중산층 이상의 소득을 올리는 가구도 경제적 압박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결국 ‘2026 실리콘밸리 인덱스’가 보여주는 핵심은 세계적인 기술 혁신과 막대한 부의 창출이 반드시 지역 주민 전체의 경제적 안정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1조 달러가 넘는 부를 만들어내고 평균 연봉이 19만 달러에 가까운 지역에서 동시에 전체 가구의 상당수가 기본적인 생활비를 충당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사실은 실리콘밸리가 직면한 구조적 문제를 그대로 보여준다.

특히 상위 10%가 전체 부의 75%를 차지하고 하위 절반은 1%도 보유하지 못하는 자산 격차가 계속 확대될 경우 주택 소유 여부와 투자자산 보유 여부에 따른 경제적 계층 분리가 더욱 고착화될 가능성이 크다. 인공지능을 중심으로 다시 막대한 투자자금이 실리콘밸리에 몰리고 있는 가운데 새롭게 창출되는 부가 어느 계층에 돌아갈 것인지, 그리고 세계 최고의 혁신경제가 지역 주민들의 주거와 생활 안정까지 함께 개선할 수 있을지가 실리콘밸리가 해결해야 할 핵심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스티브 권 기자 / steve.kwon@baynewsla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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