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라민주동포모임 온라인 특강서 과거사 청산 강조
“희생자 30만명 웃돌 것으로 추산…진상규명 미완”
“유족 고통 세대 넘어 지속…국가폭력 반복 막아야”
한국전쟁 전후 발생한 민간인 학살의 진상을 제대로 규명하려면 희생자와 피해 규모뿐 아니라 국가폭력에 가담한 인물과 당시의 지휘체계까지 구체적으로 기록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한홍구 성공회대학교 석좌교수는 3일 오후 8시(미 동부시간) 필라민주동포모임이 주관한 온라인 특강에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을 주제로 강연하며 “과거사 진상규명 과정에서 피해자 조사와 보상은 상당 부분 진전됐지만 가해자를 역사에 기록하는 작업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권오달 씨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강연에서 필라민주동포모임은 촛불혁명과 세월호 참사, 5·18 민주화운동, 4·19혁명, 제주4·3 사건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등을 기억하고 정의롭고 건강한 동포사회를 만들기 위한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고 소개했다.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와 미국 워싱턴대학교에서 공부한 한 교수는 한국 현대사의 국가폭력과 과거사 청산 문제를 연구해왔다. 현재 국가기록관리위원회 위원장과 ‘반헌법행위자열전’ 책임편집인을 맡고 있다.
▶︎ “희생자뿐 아니라 가해자 이름도 남겨야”
한 교수는 국가폭력 가해자를 구체적으로 기록하기 위해 진행 중인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 작업을 소개했다. 이 사업은 2013년 말 준비를 시작해 2015년 공식 출범했으며, 2017년 405명의 명단을 발표한 뒤 대상을 조정해 현재 312명을 중심으로 편찬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올해 5월 1차로 4권을 출간했으며 앞으로도 후속 권을 발간할 예정이다.
한 교수는 국가폭력의 범위를 폭넓게 바라보게 된 계기 가운데 하나로 세월호 참사를 들었다. 세월호 참사 당시 승객들에게 내려진 “가만히 있으라”는 안내를 언급하며 한국전쟁 때에도 국가가 국민에게 잘못된 지시를 내린 뒤 책임을 회피한 사례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과 관련해 가해자를 기록하는 작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며, 민간인 학살 분야에서 열전에 포함된 인물이 약 60명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이는 실제 희생자 규모와 국가폭력의 범위를 고려하면 극히 일부라는 설명이다.
한 교수는 국가폭력 트라우마 치유센터 건립을 위한 기초연구에서 기존 자료를 분석한 결과, 국민방위군 사건과 적대 세력에 의한 희생을 제외하더라도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희생자가 30만명을 조금 넘을 것으로 보수적으로 추산했다고 밝혔다. 다만 이는 공식 통계가 아닌 연구팀의 추산이라며 “정확한 숫자가 아니더라도 우선 추산해야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기 위한 논의를 시작할 수 있다”고 말했다.
▶︎ “‘양민 학살’ 아닌 ‘민간인 학살’로 불러야”
한 교수는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이 제주4·3 사건과 여순사건을 시작으로 국민보도연맹원 학살과 예비검속, 재소자 학살, 군사작전 과정의 민간인 희생, 부역 혐의자 처벌, 후방 토벌 과정의 학살 등 다양한 형태로 발생했다고 설명했다. 노근리 사건을 비롯한 미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과 대규모 폭격에 따른 희생, 북한 지역에서 발생한 학살, 인민군과 좌익 세력에 의한 학살도 함께 조사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양민 학살’보다 ‘민간인 학살’이라는 표현을 사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양민 학살’이라는 말에는 ‘공산주의자가 아닌데 억울하게 죽었다’는 의미가 포함돼 있다”며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자라고 하더라도 비전투원인 민간인을 불법적으로 처형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민간인 학살 문제를 이념적 기준이 아니라 국제 인도주의와 비전투원 보호의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설명이다.
▶︎ “4·19 이후 진상 밝힐 기회 놓쳐”
한 교수는 1960년 4·19혁명 이후 국회 차원의 진상조사가 추진돼 피해 신고가 113만명에 달했지만, 충분한 조사가 이뤄지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신고 숫자에는 중복이나 과장이 포함됐을 가능성이 있으나 당시에는 전쟁이 끝난 지 약 10년밖에 지나지 않아 관련 자료가 남아 있었고 가해자와 피해자도 대부분 생존해 있었다는 점에서 진상을 밝힐 중요한 기회였다고 평가했다.
이후 군사정권 아래에서 피해자와 유족들은 학살 피해를 공개적으로 말하기 어려웠다. 주변 사람과 접촉하는 것조차 감시 대상이 됐고 희생자 유골이 방치되거나 위령비가 훼손되는 일도 있었다. 유족회 활동에 참여한 사람들이 다시 처벌받는 등 피해자와 유족들은 오랜 기간 사회적·정신적 고통을 겪었다.
한 교수는 “가족이 죽었다는 사실을 제대로 말할 수도, 애도할 수도, 왜 죽였느냐고 따질 수도 없는 삶이 이어졌다”며 일부 유족은 자녀에게조차 아버지나 가족의 죽음을 설명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국가폭력으로 인한 공포와 침묵이 유족의 삶과 다음 세대까지 이어졌으며 한국 사회의 민주화 과정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그는 “죽인 사람들이 여전히 떵떵거리며 살고 있다는 측면과, 폭력 속에서도 꺾이지 않은 싹이 오늘날의 민주주의를 만들었다는 두 측면이 지금도 부딪히고 있다”고 평가했다. 또한 학살 피해를 숫자로만 바라봐서는 안 된다며 “300명이 죽은 것이 아니라 300개의 우주가 파괴된 것”이라는 취지로 희생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가족과 삶, 관계와 기억이 있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 “학살 지휘계통과 책임 소재 규명해야”
한 교수는 과거사위원회가 피해자 조사와 보상에 집중하는 동안 가해자와 지휘체계에 대한 조사는 상대적으로 소홀했다고 지적했다. 국민보도연맹 학살도 희생자 수를 확인하는 데 그치지 말고 누가 조직을 만들고 관리했으며, 전쟁 발발 뒤 누가 예비검속과 체포, 분류, 이송과 처형에 관여했는지까지 조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한국전쟁 초기 군과 헌병, 방첩기관 등이 체계적으로 작동한 사례를 제시하며 “초기 민간인 학살은 지휘계통을 따라 조직적으로 이뤄졌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다만 개별 사건의 정확한 명령 체계와 책임 소재가 모두 밝혀진 것은 아니어서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제주4·3 사건에 대해서는 제주도 곳곳에서 민간인 학살이 벌어졌던 시기가 국제사회에서 대규모 집단학살을 막기 위한 제노사이드 협약을 논의하던 시기와 겹친다고 지적했다. 여순사건 당시에도 군의 진압 과정에서 군인과 민간인에 대한 대규모 처형이 발생했으며, 당시 가해자로 지목된 세력 일부가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과정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설명했다.
국민보도연맹은 전향자 관리 조직으로 출발했지만 전쟁이 시작된 뒤 예비검속과 처형의 대상으로 변질됐다. 대전형무소를 비롯한 전국의 형무소에서도 재소자 학살이 발생한 만큼 당시 군과 경찰뿐 아니라 법무 행정 책임자의 역할도 함께 규명해야 한다고 한 교수는 강조했다.
한 교수는 기존 민간인 학살 분류 방식에도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충청북도와 경상북도 등에서 보도연맹원이 희생됐다는 이유로 보도연맹 학살로 분류된 사건 가운데 실제로는 군사작전 과정에서 민간인이 희생된 사례가 포함됐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당시 소개령을 따르지 않은 주민을 무인지대의 유격대원으로 간주해 사살한 사례가 있었다며 이러한 사건은 ‘작전으로서의 학살’로 별도 분류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서울 수복 이후 진행된 부역 혐의자 처벌 문제도 언급했다. 인민군 점령 기간에 강요받아 각종 활동에 참여한 민간인들이 광범위하게 처벌됐으며 실제로 무기를 들고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까지 부역자로 몰려 희생된 사례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한 교수는 대전 골령골과 경산 코발트광산을 비롯해 전국 각지에 학살 현장이 존재하며, 일부 지역에서는 유해가 뒤섞여 희생자 개인을 구분하기조차 어렵다고 전했다. 그는 “전국 방방곡곡의 학살터”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민간인 학살이 일부 지역에서만 발생한 예외적인 사건이 아니었다고 강조했다.
▶︎미국 내 자료 보존과 여성 피해 조사도 과제
강연 후 질의응답에서는 미국에 남아 있는 한국전쟁 관련 사진과 기록을 수집하고 보존하는 문제도 논의됐다. 한 참석자는 90세가 넘은 한국전쟁 참전용사들이 개인적으로 보관 중인 사진과 기록이 시간이 지나며 사라질 수 있다며 미국 내 한인사회와 대학, 관련 기관들이 체계적인 자료 수집에 나서야 한다고 제안했다.
한 교수는 국사편찬위원회와 한국학중앙연구원 등 한국의 여러 기관이 미국 자료를 포함한 현대사 자료를 수집·발굴하고 있으며,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도 관련 자료가 다수 보관돼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자료를 모으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정확하게 해석하고 연구할 수 있는 전문 인력과 연구 역량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한국전쟁 당시 여성들이 겪은 성폭력 피해도 앞으로 규명해야 할 과제로 제시됐다. 한 교수는 “민간인 학살은 이야기하면서 성폭력 문제는 거의 다루지 않고 있다”며 피해자와 증언자 대부분이 세상을 떠났고 기록도 충분히 남아 있지 않아 피해 규모를 파악하기조차 어렵다고 지적했다. 여성들이 성폭력을 당한 뒤 학살된 사례도 적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며 이 문제가 한국 현대사 연구에서 풀어야 할 중요한 과제라고 말했다.
한 교수는 “배상은 당연히 필요하지만 진상규명이 배상을 위한 증거를 수집하는 일로 좁아져서는 안 된다”며 “가해자들은 여전히 당당하게 살고 있고 가해의 문화도 계속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과거 국가폭력을 제대로 청산하지 않으면 폭력을 정당화하거나 책임을 회피하는 문화가 반복될 수 있다며 희생자의 명예 회복과 유해 발굴, 피해 보상뿐 아니라 가해자와 명령·집행 체계까지 역사에 기록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반헌법행위자열전’ 정기후원과 관련한 자세한 내용은 평화박물관 홈페이지(https://www.peacemuseum.or.kr)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홍구 성공회대학교 석좌교수는 3일 오후 8시(미 동부시간) 필라민주동포모임이 주관한 온라인 특강에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을 주제로 강연하며 “과거사 진상규명 과정에서 피해자 조사와 보상은 상당 부분 진전됐지만 가해자를 역사에 기록하는 작업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권오달 씨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강연에서 필라민주동포모임은 촛불혁명과 세월호 참사, 5·18 민주화운동, 4·19혁명, 제주4·3 사건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등을 기억하고 정의롭고 건강한 동포사회를 만들기 위한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고 소개했다.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와 미국 워싱턴대학교에서 공부한 한 교수는 한국 현대사의 국가폭력과 과거사 청산 문제를 연구해왔다. 현재 국가기록관리위원회 위원장과 ‘반헌법행위자열전’ 책임편집인을 맡고 있다.
▶︎ “희생자뿐 아니라 가해자 이름도 남겨야”
한 교수는 국가폭력 가해자를 구체적으로 기록하기 위해 진행 중인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 작업을 소개했다. 이 사업은 2013년 말 준비를 시작해 2015년 공식 출범했으며, 2017년 405명의 명단을 발표한 뒤 대상을 조정해 현재 312명을 중심으로 편찬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올해 5월 1차로 4권을 출간했으며 앞으로도 후속 권을 발간할 예정이다.
한 교수는 국가폭력의 범위를 폭넓게 바라보게 된 계기 가운데 하나로 세월호 참사를 들었다. 세월호 참사 당시 승객들에게 내려진 “가만히 있으라”는 안내를 언급하며 한국전쟁 때에도 국가가 국민에게 잘못된 지시를 내린 뒤 책임을 회피한 사례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과 관련해 가해자를 기록하는 작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며, 민간인 학살 분야에서 열전에 포함된 인물이 약 60명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이는 실제 희생자 규모와 국가폭력의 범위를 고려하면 극히 일부라는 설명이다.
한 교수는 국가폭력 트라우마 치유센터 건립을 위한 기초연구에서 기존 자료를 분석한 결과, 국민방위군 사건과 적대 세력에 의한 희생을 제외하더라도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희생자가 30만명을 조금 넘을 것으로 보수적으로 추산했다고 밝혔다. 다만 이는 공식 통계가 아닌 연구팀의 추산이라며 “정확한 숫자가 아니더라도 우선 추산해야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기 위한 논의를 시작할 수 있다”고 말했다.
▶︎ “‘양민 학살’ 아닌 ‘민간인 학살’로 불러야”
한 교수는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이 제주4·3 사건과 여순사건을 시작으로 국민보도연맹원 학살과 예비검속, 재소자 학살, 군사작전 과정의 민간인 희생, 부역 혐의자 처벌, 후방 토벌 과정의 학살 등 다양한 형태로 발생했다고 설명했다. 노근리 사건을 비롯한 미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과 대규모 폭격에 따른 희생, 북한 지역에서 발생한 학살, 인민군과 좌익 세력에 의한 학살도 함께 조사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양민 학살’보다 ‘민간인 학살’이라는 표현을 사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양민 학살’이라는 말에는 ‘공산주의자가 아닌데 억울하게 죽었다’는 의미가 포함돼 있다”며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자라고 하더라도 비전투원인 민간인을 불법적으로 처형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민간인 학살 문제를 이념적 기준이 아니라 국제 인도주의와 비전투원 보호의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설명이다.
▶︎ “4·19 이후 진상 밝힐 기회 놓쳐”
한 교수는 1960년 4·19혁명 이후 국회 차원의 진상조사가 추진돼 피해 신고가 113만명에 달했지만, 충분한 조사가 이뤄지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신고 숫자에는 중복이나 과장이 포함됐을 가능성이 있으나 당시에는 전쟁이 끝난 지 약 10년밖에 지나지 않아 관련 자료가 남아 있었고 가해자와 피해자도 대부분 생존해 있었다는 점에서 진상을 밝힐 중요한 기회였다고 평가했다.
이후 군사정권 아래에서 피해자와 유족들은 학살 피해를 공개적으로 말하기 어려웠다. 주변 사람과 접촉하는 것조차 감시 대상이 됐고 희생자 유골이 방치되거나 위령비가 훼손되는 일도 있었다. 유족회 활동에 참여한 사람들이 다시 처벌받는 등 피해자와 유족들은 오랜 기간 사회적·정신적 고통을 겪었다.
한 교수는 “가족이 죽었다는 사실을 제대로 말할 수도, 애도할 수도, 왜 죽였느냐고 따질 수도 없는 삶이 이어졌다”며 일부 유족은 자녀에게조차 아버지나 가족의 죽음을 설명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국가폭력으로 인한 공포와 침묵이 유족의 삶과 다음 세대까지 이어졌으며 한국 사회의 민주화 과정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그는 “죽인 사람들이 여전히 떵떵거리며 살고 있다는 측면과, 폭력 속에서도 꺾이지 않은 싹이 오늘날의 민주주의를 만들었다는 두 측면이 지금도 부딪히고 있다”고 평가했다. 또한 학살 피해를 숫자로만 바라봐서는 안 된다며 “300명이 죽은 것이 아니라 300개의 우주가 파괴된 것”이라는 취지로 희생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가족과 삶, 관계와 기억이 있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 “학살 지휘계통과 책임 소재 규명해야”
한 교수는 과거사위원회가 피해자 조사와 보상에 집중하는 동안 가해자와 지휘체계에 대한 조사는 상대적으로 소홀했다고 지적했다. 국민보도연맹 학살도 희생자 수를 확인하는 데 그치지 말고 누가 조직을 만들고 관리했으며, 전쟁 발발 뒤 누가 예비검속과 체포, 분류, 이송과 처형에 관여했는지까지 조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한국전쟁 초기 군과 헌병, 방첩기관 등이 체계적으로 작동한 사례를 제시하며 “초기 민간인 학살은 지휘계통을 따라 조직적으로 이뤄졌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다만 개별 사건의 정확한 명령 체계와 책임 소재가 모두 밝혀진 것은 아니어서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제주4·3 사건에 대해서는 제주도 곳곳에서 민간인 학살이 벌어졌던 시기가 국제사회에서 대규모 집단학살을 막기 위한 제노사이드 협약을 논의하던 시기와 겹친다고 지적했다. 여순사건 당시에도 군의 진압 과정에서 군인과 민간인에 대한 대규모 처형이 발생했으며, 당시 가해자로 지목된 세력 일부가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과정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설명했다.
국민보도연맹은 전향자 관리 조직으로 출발했지만 전쟁이 시작된 뒤 예비검속과 처형의 대상으로 변질됐다. 대전형무소를 비롯한 전국의 형무소에서도 재소자 학살이 발생한 만큼 당시 군과 경찰뿐 아니라 법무 행정 책임자의 역할도 함께 규명해야 한다고 한 교수는 강조했다.
한 교수는 기존 민간인 학살 분류 방식에도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충청북도와 경상북도 등에서 보도연맹원이 희생됐다는 이유로 보도연맹 학살로 분류된 사건 가운데 실제로는 군사작전 과정에서 민간인이 희생된 사례가 포함됐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당시 소개령을 따르지 않은 주민을 무인지대의 유격대원으로 간주해 사살한 사례가 있었다며 이러한 사건은 ‘작전으로서의 학살’로 별도 분류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서울 수복 이후 진행된 부역 혐의자 처벌 문제도 언급했다. 인민군 점령 기간에 강요받아 각종 활동에 참여한 민간인들이 광범위하게 처벌됐으며 실제로 무기를 들고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까지 부역자로 몰려 희생된 사례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한 교수는 대전 골령골과 경산 코발트광산을 비롯해 전국 각지에 학살 현장이 존재하며, 일부 지역에서는 유해가 뒤섞여 희생자 개인을 구분하기조차 어렵다고 전했다. 그는 “전국 방방곡곡의 학살터”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민간인 학살이 일부 지역에서만 발생한 예외적인 사건이 아니었다고 강조했다.
▶︎미국 내 자료 보존과 여성 피해 조사도 과제
강연 후 질의응답에서는 미국에 남아 있는 한국전쟁 관련 사진과 기록을 수집하고 보존하는 문제도 논의됐다. 한 참석자는 90세가 넘은 한국전쟁 참전용사들이 개인적으로 보관 중인 사진과 기록이 시간이 지나며 사라질 수 있다며 미국 내 한인사회와 대학, 관련 기관들이 체계적인 자료 수집에 나서야 한다고 제안했다.
한 교수는 국사편찬위원회와 한국학중앙연구원 등 한국의 여러 기관이 미국 자료를 포함한 현대사 자료를 수집·발굴하고 있으며,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도 관련 자료가 다수 보관돼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자료를 모으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정확하게 해석하고 연구할 수 있는 전문 인력과 연구 역량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한국전쟁 당시 여성들이 겪은 성폭력 피해도 앞으로 규명해야 할 과제로 제시됐다. 한 교수는 “민간인 학살은 이야기하면서 성폭력 문제는 거의 다루지 않고 있다”며 피해자와 증언자 대부분이 세상을 떠났고 기록도 충분히 남아 있지 않아 피해 규모를 파악하기조차 어렵다고 지적했다. 여성들이 성폭력을 당한 뒤 학살된 사례도 적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며 이 문제가 한국 현대사 연구에서 풀어야 할 중요한 과제라고 말했다.
한 교수는 “배상은 당연히 필요하지만 진상규명이 배상을 위한 증거를 수집하는 일로 좁아져서는 안 된다”며 “가해자들은 여전히 당당하게 살고 있고 가해의 문화도 계속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과거 국가폭력을 제대로 청산하지 않으면 폭력을 정당화하거나 책임을 회피하는 문화가 반복될 수 있다며 희생자의 명예 회복과 유해 발굴, 피해 보상뿐 아니라 가해자와 명령·집행 체계까지 역사에 기록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반헌법행위자열전’ 정기후원과 관련한 자세한 내용은 평화박물관 홈페이지(https://www.peacemuseum.or.kr)에서 확인할 수 있다.


